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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 언어는 연, 음악은 후렴구
김용언 사진 오계옥 2009-08-07

예술가 성기완

토요일 점심 무렵 성기완에게 인터뷰 요청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에 가 있었고, 주변이 무척 시끄러워 통화가 힘들었다. 비로소 조용한 통화가 가능했던 건 월요일에서였다. 페스티벌에 3일 내내 머무르는 동안 어떤 팀이 흥미로웠는지 물었을 때, 그는 패티 스미스(“너무 멋있는 할머니라서, 누나라고 불러드려야 한다”)와 베이스먼트 잭스(“카니발처럼 잘 준비된 패키지 쇼를 선보였다. 사운드도 다른 팀보다 확연히 좋았고”)를 꼽았다. 1970년대부터 활동했던 펑크 신의 대모와 2004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댄스 앨범상을 수상했던 일렉트로니카 그룹을 함께 즐기는 그의 취향이 새삼스러웠다.

성기완은 시인이자 번역자이며 홍대 인디 뮤직 신의 대표주자 ‘3호선 버터플라이’(이하 3호선)의 멤버다. <싱글즈> <플라이 대디> 등의 영화음악을 맡았고, 2005년부터 올해 초까지 EBS FM 프로그램 <세계음악기행>(이하 세음행)을 진행했다. 현재는 음악 관련 강의, 홍대 앞 최고의 술집 ‘곱창전골’의 DJ, 프리랜서 글쟁이 등의 부가 활동도 겸한다. 그중에서도 최근 저서 <홍대 앞 새벽 세 시>는 홍대 앞 10년간의 풍경을,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군상의 정서를 느슨하고 분방하게 펼친 독특한 에세이집이다. 10년 전의 홍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다시금 뜨거워질 수밖에 없을 생생한 기록물을 읽다가, 대체 이 사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해졌다.

-새삼스럽게 뭐가 본업이냐고 묻는 건 무의미한 질문 같다. 대신 어떤 시점에 특정한 매체를 택하는 이유를 묻는 쪽이 더 맞을 듯하다. =많아 보여도 정리해보면 별것 없다. 내가 관심 갖는 두 분야인 문학과 음악이 다양한 매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집 <당신의 텍스트>와 솔로 앨범 <<당신의 노래>>는 같은 시기 ‘한쌍’으로 등장했다. 특정한 테마를 언어와 사운드로 분리한 이유가 뭔가. =‘당신’이라는 테마가 어느 순간엔 장황한 시로, 어느 순간엔 단순한 사랑 노래로 표현될 수 있다. 서로 소용돌이처럼 휘돌면서 감싸는 연(verse)과 후렴구(chorus)의 관계라고 할까. 이러저러했어, 그래서 사랑한단 얘기야, 이러저러했어, 그래서 미안하단 얘기야. 일단 전달해야 할 이야기를 연에서 건넨 다음, 후렴구에선 그 내용의 핵심이나 더 아래쪽의 단순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전자가 시집이고, 후자가 앨범이다. 1절에서 2절로 그냥 넘어가는 것도 아쉽고, 후렴구만 공허하게 외치는 것도 아쉬워서 같이 한쌍으로 발표했다.

-요즘도 연과 후렴구의 관계를 동등하게 유지하는 편인가. =점점 후렴구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단순하고 무의미한 무언가가 반복되면서 중심을 형성하고, 그 따뜻하고 물렁한 중심으로 뭔가 슉 들어올 수 있는 과정 자체가 후렴구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ㄹ별곡>이라는 시를 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글 자모가 ㄹ이다. 돌돌 굴러가고, 감기도 하고, ‘로큰롤’이라는 단어에도 많이 들어가고. (웃음) 시나 노래의 발음상에 ㄹ이 여왕벌 역할을 하는 것 같다. <ㄹ별곡>은 ㄹ을 사용한 단어들을 죽 따와서 ‘리랏다’로 끝나는, 전체가 거의 무의미한 후렴구인 시다. 이젠 글 역시 후렴구적으로 쓰고 싶다.

-<홍대 앞 새벽 세 시>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90년대 홍대 앞’에 관한 좋은 입문서다. 이에 따르면 ‘홍대 앞’은 홍대 미대쪽으로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중반 인디음악의 발흥과 함께 대중화되었다고 정리할 만 하다. =예를 들어 미대 출신이자 ‘황신혜밴드’로 잘 알려진 김형태씨가 운영하던 클럽 ‘곰팡이’는, 당시의 전위적인 극과 음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엄청 유명해진 미술가 이동기씨가 ‘곰팡이’ 벽에 스파이더맨 그림도 그렸고. 그렇게 병존하던 다른 장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스로를 퍽 터뜨리는 과정에서 파편들이 튀었다. 그 파편들이 서로 교류했고, 안에 있던 진액들이 점점 스며드는 데까지 꼭 10년이 걸렸다. ‘크라잉넛’이나 ‘노브레인’을 배출한 클럽 ‘드럭’도 처음엔 레게 바였다. 그런데 희한한 애들이 자꾸 드나들면서 공간의 성격을 바꾸었다. 미술에서 말하는 ‘의도적인 점거’(squat)처럼 특정 세대가 그 공간을, 말하자면 점거한 것이다. 보통은 주인들이 침입자들에게 나가라고 할 텐데, 여기선 받아들일 준비가 됐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말달리자>가 그 세대의 송가가 되고, 그애들이 이쪽 동네의 주인으로 활개치고 다니면서 더 심화되었다. 결정적으로 2002년 월드컵 이후 홍대 앞은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지금도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홍대 앞에 많지만, 90년대 중반만큼 폭발력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욕구불만의 상태는 팽창했는데,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터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글쎄, 구심점이 생긴다면 이젠 다른 데서 다른 느낌으로 생기겠지. 일례로 젊은 미술가들은 문래동 빈 공장지대에 모여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것도 힘있게 터지려는 하나의 싹 아닐까. 홍대 앞은 2002년 이후로 다른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예전엔 비일상적이었고, ‘우리는 달라’라고 주장했다. 이젠 ‘장기하와 얼굴들’의 인기만 봐도 그런 모습을 낯설고 웃기게 보기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부분을 여기서 공유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예전보다 의미는 덜 강렬해졌을지 몰라도 일상화됐다고 해야 할까. 저쪽에서 터질 것 같으니까 홍대는 죽었구나라는 생각보다 ‘거기도 있고 여기도 있고 그렇게 산발적이면서 비중심적으로 흘러간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면서 더 심각해질 텐데, 상업적인 대중매체의 압도적인 트렌드에 저항하는 조그만 거점들이라고 할까, 그게 형성되는 과정인 것 같다. 또 다른 초기 단계다. 아직 뭘 좀 더 만들어야 한다.

-홍대쪽 토박이로서 혹시 그런 현상에 대한 상실감은 없나. 예전의 홍대를 그리워한달지. =다른 건 몰라도 아직 음악은 홍대 앞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순히 소비적인 차원을 떠나, 뭔가 행해지고 있고 실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직 상실감을 느낄 때가 아니다. (웃음) 90년대 중반의 모든 움직임에는 뭔가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우리끼리만 놀려고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의 홍대는 그렇게 알려진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재처리 방법들이 나와야 한다. 예전보다 밍밍해졌다면, 다시 진한 걸 탄다든가 끓인다든가. 상실감이 아주 없다고, 지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홍대 앞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예전엔 주차장 거리에 몰렸던 공간들이 산울림소극장쪽이나 신촌, 연남동까지 넓어진다. 이 공간 자체도 변화한다는 걸 다른 국면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난해에 <라듸오 데이즈> 음악을 담당했다. 한때 쏟아져 나왔던 30년대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들과 어떤 차별점을 두려고 했나.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음악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게 된다. 현대적인 요새 음악을 써서 “그때는 쟤들도 우리랑 똑같이 연애하고 음모를 펼치는구나”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쪽이 있다. 반대로 철저하게 그 시대 음악을 쓰면서 “너희들도 이리 와봐”라고 권하는 쪽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은 신시사이저를 사용하여 80년대 트렌드 뮤직을 수용했지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카튼클럽>은 완벽한 30년대 음악을 썼다. 난 <라듸오 데이즈>에서 후자로 가보려 했다. 신경을 나름대로 많이 썼고, 지켜내고자 했던 일관성을 비교적 잘 가져갈 수 있어서 만족한다.

-구체적으로 30년대 음악의 어떤 점에 집중했던 건가. =개인적으로 30년대가 한국 대중문화의 첫 번째 폭발이라고 본다. 이상이나 박태준 같은 작가가 배출됐고, 스윙이나 탱고처럼 최초의 월드 와이드 트렌디 뮤직이 쏟아져 들어왔다. 30년대 음악인들은 그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굉장한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예전까지 민요를 만들던 사람들이 스윙을 처음 접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더군다나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내 것’으로 소화했다는 게 대단하다. 음악적인 포스도 엄청나고. 대표적인 분이 김해송이다. 그분의 노래 <청춘계급>을 <라듸오 데이즈>에서도 리메이크했다.

-사실 이난영 노래를 찾아 듣다가 김해송이 이난영의 남편이자 그녀에게 수많은 노래를 선사한 작곡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난영 하면 딱 떠오르는 노래 <목포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르더라. =그러니까! 30년대 음악은 뽕짝스럽지 않다. 일본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뽕짝이 대중화된 건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김해송에 대해 뭔가 해보고 싶다. 그분의 전기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구상 중이다. 거의 텔레파시 수준, 빙의 수준으로라도 시도해보고 있다. (웃음)

-O.S.T 앨범은 독립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런 30년대 컨셉의 음악을 따로 기획 앨범으로 만들면 어떨까. =안 그래도 한복밴드를 결성해서 빅밴드 형식으로 공연해보고 싶다. 지금의 인디 뮤직 넘버를 스탠더드 풍으로 편곡해서 패키지 쇼를 펼치는 거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원과 악기를 많이 잡아먹는 작업이라 여의치가 않은데… 심지어 꿈까지 꿨다. 깨고 나니 슬퍼서 뜬눈으로 누워 공상을 오래도록 했다. (웃음) 사실 올해는 ‘3호선’ 10주년이라서 그쪽에 집중하느라 30년대 커버밴드는 미루고 있다.

-정말! 1999년에 결성됐으니까. 3집은 2004년에 나왔는데 혹시 신보를 낼 계획이 있나. =어느 날 꿈에서 어떤 노래를 만들었는데 괜찮더라고. 깨자마자 휴대폰에 대충 그 테마를 녹음한 다음 멜로디를 붙였다. EP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밴드 멤버들과 열심히 작업 중이다. 9, 10월경에 나올 것이다. 요즘 인디 뮤직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산뜻한 ‘샤방샤방’으로 많이들 가는데, 우리 EP에선 ‘그런 거 아니야, 한번 더 구질구질해져보자’라고 말할 거다. ‘3호선’의 예전 앨범들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게 정말 10년 전에 나온 음악 맞아?”라고들 하더라. 나도 다시 들어보니 민망하지만 요새 애들보다 더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흠흠. (웃음) 우리 색깔을 죽이지 않고 유지하더라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얻었달까.

-EBS 라디오에서 <세음행> DJ를 오랫동안 맡았다. =그동안 월드뮤직이라고 하면 너무 비슷비슷했다. 라틴이나 이탈리아 계열, 혹은 각 국가의 민속음악을 팝음악화한 것 위주로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젊은 친구들은 록이나 힙합처럼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문법들을 수용하면서 자기들 로컬만의 색깔을 내잖아. 소말리아 사태가 터진 날에는 방송에서 소말리아 힙합을 트는 식으로, 그렇게 일반적인 월드뮤직에서 빠진 음악들을 찾아 새롭게 채워넣는 일이 재밌었다. 한국의 인디 뮤직, 아시아 록도 그 연장선상에서 함께 소개했다. 특히 피노이 록(Pinoy Rock)은 발견이었다. 필리핀의 60, 70년대 록을 들어보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한국의 뺨을 열대씩 때려도 될 정도다. (웃음) 갑작스레 하차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4년 동안 꾸준히 쌓아온 그 데이터베이스가 현재 프로그램에서 유지되거나 수용되지 않는 것 같다. 뭐 요즘 시대엔 어느 문화판에나 늘 있는 일이지만. 안 그래도 <세음행>의 안재필 작가와 합동 블로그 이야기도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지난해에 두달 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그때 가져온 음악과 느낌들을 나만 갖고 있기가 아깝다.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업데이트를 하면 어떨까….

-8월부터 한예종 자유예술캠프에서도 강의한다고 들었다. =예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강연했던 ‘크리에이티브 리스닝’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갖고 갈 예정이다. 예를 들어 산울림 노래에서 폴 베를렌의 시를 떠올리고 그러면서 고려가요로 넘어가는 게 가능하다. 우리 모두 음악을 듣더라도 사실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다른 마음들을 듣는 거잖아. 그런 통합적인 느낌이 참 중요한데 별로 얘기되는 것 같지 않다.

-이 일들을 한꺼번에 하다니… 설마 올해 준비하는 다른 일들이 더 있는 건가! =아프리카 여행기를 가을쯤 책으로 묶는다. 시집도 한권 더 낼 예정이고, 연말까지 성장소설을 한편 쓰기로 했다. 밴드를 하는 10대 후반 청춘의 이야기인데, 배경은 1996년으로 잡되 직접적으로 홍대 앞을 거명하진 않으려고. 사실 특정 공간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24시간 파티 피플>을 봐도, 맨체스터 클럽신을 영화화하는 데 20년이 걸렸잖나. 대신 당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청춘소설 형식은 가능할 것 같다. 근데 지금까지 한 열줄 썼나…. (웃음) 그리고 EP 작업까지. 어휴, 사람이 이 네 가지 이상 어떻게 더 하겠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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