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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E.T>가 생각나네

<디스트릭트9>에서 발견할 수 있는 SF소설과 영화의 그림자

닐 블롬캠프는 <디스트릭트9>을 만들며 특정 작품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SF광이었던 감독 본연의 취향은 영화 곳곳에서 명백한 레퍼런스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삐져나온다. 그 숨은그림찾기 또한 ‘보는 이들이 SF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즐거움의 강도가 달라질 것이다. SF평론가이자 번역가 김상훈이 <디스트릭트9>에서 발견할 수 있는 SF소설과 영화의 레퍼런스들을 추적했다.

<디스트릭트9>은 SF의 전범을 충실히 답습하면서도 배경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문화·정치적 특수성을 액션영화의 틀에 무리없이 융합한 수작이다. 이 영화의 관객이 느끼는 ‘신기함’은 해당 장르에 대한 그 관객의 친숙도와 정확하게 반비례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모방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종종 SF의 메타기법의 하나로 간주되곤 하는 환골탈태의 묘를 살려 클리셰의 함정에 빠지는 일 없이 SF의 현지화·토착화에 성공했다는 점은 국내 관계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굳이 <디스트릭트9>의 장르를 규정하자면 호러SF, 그것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향취를 간직한 보디호러(body horror)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독 닐 블롬캠프는 액션이나 사변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소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장르 특유의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이런 노련함이 독서와 게임, 애니메이션 제작 등으로 다져진 SF팬으로서의 경험과 지식에 기인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디스트릭트9>은 일반 대중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거나 괄목할 만한 독창성을 내세우기보다는 이미 잘 알려진 장르의 관습을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거칠게 짜맞춤으로써 복합적인 ‘재미’를 생성하는 영화다. 직인적인 견실함과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에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제3세계적 시각의 조합에서 오는 매력이라고 할까. 감독 자신이 ‘요하네스버그 SF’라고 부르는 이 작품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 영화의 기본 소재인 ‘외계인 출현’ 테마를 중심으로 원전 내지는 원류(源流)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주마간산식으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외계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

소설 <이셔의 무기점>(1951)

까마득한 미래, 전 인류를 지배하는 이셔 제국의 압정에 대항해서 인민들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는 “무기를 살 권리는 자유로워질 권리이다”라는 모토를 내세워 최신식 개인용 방어무기를 판매하는 ‘이셔의 무기점’이었다. _<이셔의 무기점> 중에서

로저 에버트로 하여금 “고차(高次)의 SF가 될 기회를 놓치고 일개 스페이스 오페라”로 만들어버렸다고 탄식하게 한 <디스트릭트9> 후반의 전투장면은, 단순한 팬서비스라기보다는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필연의 산물로 보는 쪽이 아귀가 맞는다. 영화 말미에서 이미 결정적인 회심(回心)을 경험한 변화를 통해 주인공은 자기 내부의 폭력을 완전히 해방함으로써 인류 이상의 존재로 ‘탈피’할 필요가 있었고, 인간에게는 조작이 불가능한 프런들의 중화기를 (마치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심미적인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디스트릭트9> 전반에 걸쳐 끈덕질 정도로 되풀이되는 각종 무기의 언급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비글 호의 모험>(1950)으로 유명한 작가 A. E. 밴 보그트가 <이셔의 무기점>을 통해 제시한 아나키스트적인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비전에 한없이 가깝다. 자칫하면 무기 페티시로까지 오인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국적회사의 외계 무기에 대한 집착은 편의주의나 개인적 취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세계 유수의 고성능 무기 개발국인 동시에 총기를 사용한 개개인의 강력 범죄에 시달리고 있는 남아공 ‘요새’의 지정학적 상황을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외계 우주선의 갑작스런 출현

소설 <유년기의 끝>(1953), 영화 <에이리언>(1979)

강대국간에 치열한 군비경쟁이 벌어지던 20세기 말, 거대한 원반형 우주선들이 세계 각국의 수도 상공에 출현, 초월적인 과학력을 무기로 지구를 제압한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의 지배하에 태평성대를 맞이한 지구는 외계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새로운 진화의 첫발을 내딛는다. _<유년기의 끝> 중에서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 있는 거대한 외계 우주선의 영상을 보고 즉물적인 <인디펜던스 데이>(1996) 대신 아서 C. 클라크의 명작 <유년기의 끝>의 충격적인 도입부를 떠올린 SF독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음영이나 요철이 비교적 뚜렷한 우주선의 복고풍 외부 디자인은 플라모델을 유용했던 <스타워즈>(1977)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만, 이단 우주선 내부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의 전통을 잇는 외잡스러운 생활감(?)이 관객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내 친구 외계인

영화 <E. T.>(1982), <코쿤>(1985), <다이조부, 마이 프렌도>(1983)

뉴웨이브와 페미니즘, 민권운동의 영향을 받고 문학적으로 성숙한 1970년대 SF문학에서 현실적이면서도 정교하고 세련된 외계인 묘사는 이미 신기한 것이 아니지만, 주로 상업적인 이유에서 변화에 소극적이었던 할리우드를 상대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영화는 역시 스필버그의 <E. T.>이다. 지구에 홀로 표류한 외계인 과학자와 고독한 소년의 동화적인 교류를 그린 이 영화는 단순한 가족영화의 틀을 넘어선 전 세계적인 사회현상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영화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광범위하며 다분히 편의주의적인 방향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호적인 외계인들과 양로원 노인들의 교류를 다룬 론 하워드의 <코쿤>은 바로 이런 과도기적 경향을 대표했다.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장편을 직접 영상화한 괴작 <다이조부, 마이 프렌도>(1983)도 주연인 피터 폰다를 통해 우호적인 외계인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외계인은 인간 생존의 적수?

소설 <우주전쟁>(1898), <솔라리스>(1961)

H. G. 웰스 이전에도 지성을 가진 지구외(外) 생명체를 묘사한 문학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위니즘이 맹위를 떨치던 제국주의 시절 영국에서 외계인인 화성인이 종간(種間) 생존경쟁의 적수로 간주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소설이 출간된 이래 다짜고짜 인류를 멸망시키고 지구를 식민화하려고 획책하는 폭력적 외계인의 이미지는 SF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가장 강고한 클리셰 중 하나로 고착되었다. 이 이미지는 향후 1세기에 걸쳐 분석과 분화와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불가지한 타자(他者)로서의 외계인이라는 개념은, 바다로 뒤덮인 행성을 무대로 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장편소설 <솔라리스>(1961)를 통해 극명하게 형상화되었다.

사회적, 인종적 메시지를 담았다

영화 <에일리언 네이션>(1988)

1988년에 미국의 모하비 사막에 외계인 노예 30만명을 태운 UFO가 불시착한다. 미국 정부는 인간을 닮은 이들에게 신참자(Newcomers)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구 정착을 허락한다. 이들은 인류사회에 융합하려고 하지만 곧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에 직면해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3년 뒤 LA 신참자들의 거리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에서 동료를 잃은 경찰관 사이크스(제임스 칸)는, 새로 온 파트너(맨디 패틴킨)가 외계인 신참자임을 알고 반발한다.

설정만 본다면 <디스트릭트9>의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인종문제와 관련된 은유보다는 버디무비의 요소가 더 강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신 훗날 제작된 드라마와 TV영화 버전들은 시드니 포이티에가 주연한 <밤의 열기 속으로>(1967)를 방불케 하는 사회적, 인종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ET형 외계인에서 인간형 외계인으로의 완만한 이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디스트릭트9>의 경우는 어떨까? 외계인 ‘프런’(prawn)의 CG적 이질성이 로케이션 장소로 쓰인 소웨토 지구의 진짜 슬럼 풍경과 맞물려 강렬한 상징성을 발휘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악명 높았던 아파르트헤이트나 계급정책 등에 대한 블롬캠프의 비판의식은 남아공인 특유의 국민성에 대한 인사이드 조크 내지는 빈정거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대표하는 아프리카계- 백인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는- 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 갱단을 위시한 흑인 이민자들조차도 정치적 적절함과는 거리가 먼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는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민감하고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정신의 연금술적인 변화

영화 <비디오드롬>(1983)

물리적 혹은 정신적 수단에 의한 인간 존재의 확장은 비단 사이버펑크뿐만 아니라 SF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화두이며, SF영화에서는 매체 특성상 전자의 묘사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주인공들은 <로보캅>(1987)처럼 육체적인 개조를 받거나, 각양각색의 슈퍼히어로들처럼 돌연변이를 경험하고 인간 이상/이하의 존재로 변한다. SF영화라면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논리가 동원되지만, 호러의 경우 변신의 논리적 정합성(整合性)은 필수조건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보디호러 장르는 폭력에 의한 인간 육체의 훼손이나 질병, 기생, 돌연변이 따위를 통해 관객의 심리적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스플래터 호러에 근접해 있지만, 순차적 혹은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공포를 극대화하는 테크닉은 오히려 SF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존 카펜터의 <괴물>(1982)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 등 SF에 뿌리를 박은 보디호러는 단순한 몬스터 장르를 넘어선 인간 육체의 변용을 다루고 있다. 이 하위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TV라는 대중미디어를 통한 인간 정신과 육체의 훼손 가능성을 기괴하고 몽환적인 터치로 천착함으로써 컬트의 지위에 올랐다.

<디스트릭트9>과 <비디오드롬>의 유사성은 육체와 정신 양쪽에 걸친, 거의 연금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변신의 묘사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남아공 출신 주인공의 제례적 죽음- 연금술에서는 흥미롭게도 흑화(黑化) 과정이라고 불리는- 은 새우처럼 생긴 외계인 ‘프런’들이 만든 검은 영약(靈藥)을 사고로 뒤집어썼을 때부터 시작된다. 변화는 몸의 말단에서 시작해서 육체 전체로 파급되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운명을 180도 바꿔놓는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보디호러의 묘사는 거의 교과서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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