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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정확히 40도, 반신욕 하기 딱 좋은…
김중혁(작가) 2009-12-10

늘 뜨겁거나 차가운 장면이 동시에 떠오르는 류승완표 영화의 정수 <타임리스>

아직 <파주>를 보지 못했다. 지난 몇주 동안 <씨네21>을 열심히 읽었더니 <파주>를 본 것 같다. 많은 분이 <파주>에 대해 다양한 영화평을 써주셨고, 김연수군은 본 칼럼에서 2회에 걸쳐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는 대사를 인용하며 ‘올해의 대사’ 부문의 강력한 후보로 <파주>를 추천하였는데, 심지어 지난주에는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과 그 질문을 반사시킨 질문인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세요?”를 연결시키며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의학적인데다 밑도 끝도 없는 칼럼을 써서 영화를 보지 않은 나를 괴롭게 하였다. 나도 영화의 대사를 빌리자면, “김연수군은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김연수군은 나에게 되묻겠지. “왜 아무런 글도 쓰지 않으세요?” 쩝, 그런 식으로 물어오면 할 말이 없다.

한재림 감독의 신작은 언제쯤 보려나

나는 오랫동안 김연수군의 ‘성실’을 부러워했다. 그는 늘 성실했다. 20대의 김연수군을 생각하면 벽을 향해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뒷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그는 언제나 글을 썼고, 또 썼고, 계속 썼다. 1994년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열권의 소설책과 두권의 에세이책을 냈으니 거의 1년에 한권꼴로 책을 펴낸 것이다. 노자의 말 중에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이라는 게 있다. 가고 가고 가다보면 알게 되고, 하고 하고 하다보면 깨닫게 된다는 건데, 김연수의 경우에는 아마도 쓰고 쓰고 쓰다보면 손가락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그렇게 성실한 김연수군도 이제는 어느덧 마흔을 넘기고 체력이 소진된 것인지, 올해 초 야심차게 시작하여 초반 발랄하고 상큼한 칼럼을 쏟아냈던 <씨네21> 연재 원고에 통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칼럼처럼 유머를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이 다 아플 지경이다. 오늘 낮 카페에서 김연수군을 만나 물어보았다.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김연수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엔 멋져 보여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였고, 지금은 그냥 써야 할 글이 자꾸 생기는 것 같네.” 질문과 상관없는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나의 친구 그의 영화’도 막을 내릴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김연수의 팬은 좋을 것 같다. 어쨌거나 1년에 한권꼴로 책을 펴내고 있으니, 2주일에 한번 <씨네21>에도 글을 쓰고 있으며, 에 또, 일간지에 시를 소개하는 글도 쓰고 있으니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행복할 것 같다. 나는 불행한 편이다. 나는 <씨네21>에 글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나의 사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올해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활동은 아주 미미하였다. 이제 곧 연재도 끝날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감독은 세명 정도다. 그중 한명인 장진 감독은 지난 10월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발표하며 나의 빈 마음을 채워주었지만, 한재림 감독은 2년이 넘도록 뭘 하고 있는 것이며, 류승완 감독의 <야차>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한재림 감독과 류승완 감독의 신작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지만 영화의 세계는 노자의 생각과 달라서 찍고 찍고 찍다보면 개봉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류승완 감독의 단편 <타임리스>라도 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류승완 감독

<타임리스>는 휴대전화 업체의 광고로 만들어지긴 했지만(http://www.motoklassic.com에 가면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이나 마찬가지다. 뛰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싸우며 온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류승완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 보고 나면 온몸이 뜨끈뜨끈하게 데워지는 액션과 듣고 있다 보면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드는 유머가 잘 배합돼 있기 때문이다. 온수 밸브와 냉수 밸브를 잘 조절해서 반신욕하기 좋은 40도 정도의 수온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류승완 감독은 언제나 그걸 해낸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기억할 때도 늘 뜨거운 장면과 차가운 장면이 동시에 떠오른다.

<주먹이 운다>는 너무 뜨거워 살이 익는다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정두홍과 류승범의 액션장면을 기억할 때는 몸이 뜨거워지지만, 류승범이 야쿠르트를 먹다가 던진 “그러니까 그분들이 안에 계시잖아요?” 같은 대사나 “방송실에 계세요?” 같은 대사를 떠올릴 때면(크크, 아, 다시 생각해도 웃기는구나)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다. <짝패>에서도 그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도 그랬다. 내가 류승완 감독의 작품 중 <주먹이 운다>를 가장 ‘덜’ 좋아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주먹이 운다>는 너무 뜨거워서 마음을 식힐 장면이 없다. <짝패>의 온도가 40도라면,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38도, <피도 눈물도 없이>는 43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45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36도, <주먹이 운다>는 50도다. 너무 뜨거워서 살이 발갛게 익는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타임리스>는 다시 40도의 영화다. 액션과 유머와 감정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정두홍과 이경미와 황병국의 연기에 실없이 웃다가도 온몸을 던지는 케인 코스기의 액션에 살이 떨린다.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마지막 액션장면을 보고 나면 어찌나 온몸에 힘을 주었던지 장편영화를 보고 난 것처럼 힘이 빠진다. 정확히 40도의 온도로 영화를 보고나면, 마치 반신욕을 한 것처럼 땀을 쭉 빼고 나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성룡의 영화를 보고 나올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보고 났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류승완 감독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전성기 때의 성룡처럼 매년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액션과 새로운 웃음으로 반신욕을 하고 싶다. 그나저나 나도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김중혁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10년이 넘도록 딱 두권의 책을 썼으니 이것 참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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