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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여배우여, 쓰자
고경태 2009-12-11

“하얀 원피스를 입을 거예요.” 한비야씨가 쓴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를 뒤적이다가 눈길이 멎었다. 배우 김혜자씨의 말을 인용한 대목이었다. “나는 배우니까 현장에서도 카메라 앞에서만은 배우여야 해요. 여기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서도 하얀 원피스를 입을 거예요. 하얀 옷이 비참한 현장과 극적인 대비가 될뿐더러 내 얼굴이 훨씬 예쁘게 나오니까요.” 4년 전의 에피소드다. 김혜자씨가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친선대사 자격으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갔을 때다. 정부 고위관리들과의 면담을 앞두고 하얀 원피스에 은은한 장미향까지 품고 나타난 그녀. 맨 얼굴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씨의 수수한 모습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넨다. “비야씨는 외모에 신경을 너무 안 쓰는데 그러면 안돼요…. 이제 자기도 두 얼굴이 있어야 해요. 현장에서 도와줄 때의 얼굴과 현장 밖에서 도와달라고 할 때의 얼굴 말이죠. 두 번째 얼굴은 매력적일수록 좋아요. 여성의 매력을 그런 데 쓰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그건 사랑이었네>에 따르면, 김혜자씨는 두 얼굴의 여인이다. 춥고 벌레가 나오는 구호현장에서 며칠이나 세수를 못한 채로 지내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비장미를 지닌 멋진 모델로 변신한다. 어쩌면 이것은 여배우의 본능이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두 얼굴’의 소유자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들은 ‘여신’이라 불린다.

여신들의 멋과 아름다움이 한껏 폭발하는 순간은 역시 ‘레드카펫’ 위에서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둘러본 포털의 연예뉴스들은 여배우 사진들을 올리느라 난리가 아니다. 12월2일 열린 제30회 청룡영화상 행사장에 입장하는 풍경들을, 차에 내리는 순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카메라의 포커스는 대개 ‘입었다’기보다는 ‘걸쳤다’에 가까운 드레스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에 있다. 여배우들의 화려함은 무죄다. 쉴새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는 여배우들의 보람이다. 다만 그 사진을 통해서는 ‘두 얼굴’ 중 한쪽만 보일 뿐이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여신들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제 레드카펫 못지않은 패션화보 촬영장에서, 그녀들은 독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관객은 그 옆자리에 살짝 걸터앉아 엿듣는 착각에 빠져든다. 20대 김옥빈에서 60대 윤여정까지 세대를 아우른 여배우들의 입심은, 이 영화를 올해 가장 유쾌한 웃음을 선물한 작품으로 기록하게 할지도 모른다. 잡지 편집자로서의 욕심을 덧붙이자면, 그 거침없는 ‘말하기’가 ‘쓰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기 치유의 효과로 따지자면, 쓰기가 훨씬 높다. 지난주 아쉽게도 22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박중훈 스토리’의 바통을 다른 여배우가 받았으면 좋겠다. 화통하고 진솔한 ‘여배우 스토리’를 <씨네21> 지면에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