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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피터 잭슨의 창조적 위기는 실수일 뿐

피터 잭슨의 신작 <러블리 본즈>의 시작은 좋다. 열네살 소녀가 1970년대의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나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등장하는 사람들과 장소 등이 사실적이고 인상적이지만 어느 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 영화의 초반 3분의 1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다음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관객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의 처음 내레이션에는 “내가 살해되었을 때 나는 14살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소녀가 실종된 뒤 영화는 갑자기 이상해진다. 소녀는 천국, 아니 적어도 천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어떤 장소로 들어선다. 그곳은 지나치게 환상적이다. 울긋불긋한 사탕색이 뒤섞인 자연 풍경에, 엄청나게 큰 아이들의 장난감이 있는 곳. 멋진 나무의 녹색 잎들이 새처럼 모두 날아다니고, 아주 큰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모형 배들이 바다에서 흘러들어와 바위에 부딪히는 곳. 하나하나 놓고 보면 모든 이미지가 뛰어나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 이르면 시폰 케이크를 연이어 두개 먹었을 때처럼 과도한 환상에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피터 잭슨의 지나친 상상력이 영화를 뒤틀어버린다. 실제 세계의 장면들이 훌륭한 것에 비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창의성이 있는 것 같다. 피터 잭슨이 초기에 보여준 창의성은 빈곤의 창의력이다. 별것 아닌 것을 갖고도 특별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창의력. 제한된 자유와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한정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도전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런 창의력은 둘 더하기 둘을 다섯으로 만든다. 이것과 다른 두 번째 종류의 능력은 부유함의 창의성이다. 별다른 제한도 없고 끝없는 가능성을 열어둔 상황에서 작업할 때 바로 이런 창의성이 요구된다. 예산과 CGI 기술 능력을 고려할 때 피터 잭슨은 그가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천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일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다.

내가 보기에 <러블리 본즈>는 앞으로 더 멋진 영화들을 기대해도 좋을 피터 잭슨이 저지른 잠깐의 실수다. 어떤 감독들은 첫 번째 창의성에서 빛을 발하지만, 성공이 가져다준 새로운 기회들을 앞에 놓고 두 번째 창의성에서 침몰하기도 한다. 장이모 감독이 그렇다. <영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의 최근 영화들은 무엇인가를 절실히 찾고 있지만 결국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 창의성의 경우 그 목표는 분명하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감독들은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억압된 감독들은 간접적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려 한다. 1990년대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처럼 권위적 정권이 무너지면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들은 비판의 분명한 대상을 상실한 채 왜 작업을 하는가에 대한 목적의식의 위기를 겪는다.

고예산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드는 것 역시 비슷한 미학적 위기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특수효과를 이용한 재난영화들이나 판타지영화들에 대한 도전은, 어떻게 하면 기술적 한계를 넘어 경이로우면서도 실재 같은 장면들을 만들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CGI 기술의 진보를 통해 어떤 장면이든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지금, 유일한 제약은 사람의 상상력이다. 제임스 카메론 같은 감독들은 두 번째 종류의 창의성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몇년간은 창의적이기보다는 단순히 특수효과에 더 많은 돈을 들인 <2012>나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같은 영화를 참으면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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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