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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show] 아이돌 덕에 대중음악 소비 늘었죠

영화감독 변영주, 작곡가·프로듀서 방시혁을 만나다

1967년,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첫 등장을 지켜본 에릭 버든(애니멀스)은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구나. 비록 저 멀리 베트남에서는 폭탄이 터지고 있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자고 나면 새로운 파이오니어들이 나타나 대중음악을 쉼없이 혁신하던 시절. 이제는 아니다. 트렌트 레즈너(나인 인치 네일스)가 “누군가 내 이마에 총을 겨누고 최근 5년간 새롭게 등장한 뮤지션 중 괜찮았던 녀석 다섯만 대라고 하면 내 머리통은 박살날 것이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때로부터도 이미 10여년이 흘렀다.

동시대의 조류를 비판하기란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트렌드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도외시한 비판은 어쩌면 게으른 처사일지 모른다. 상업주의 혹은 답습이라는 이름으로 간편하게 꼬리표를 붙이고 말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류 문화계의 외연을 확장하여 마침내 비주류까지 포용해낼 수 있을 것인지, 나아가 앞선 세대의 유산과 지혜를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지에 대해 문화 생산자로서의 고민을 품고 있는 변영주 감독이, 그 힌트를 모색하고자 당대 최고 히트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방시혁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변영주: 2AM의 <죽어도 못 보내>를 들으면서 되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가사를 보면 찌질한 남자의 이야기잖아요. 조금 더 나아가면 범죄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웃음) 하지만 이 노래를 2AM이 불렀기 때문에 호소력을 가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죽어도 못 보내>를 작곡할 때는 2AM이라는, 잘 알려진 그룹의 이미지까지 고려해서 곡과 가사를 안배하시지 않았나 싶은데요.

방시혁: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사실 2AM의 전작인 <이 노래>도 좋은 곡이긴 하지만 멤버들의 나이대에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죠. 그래서 그들을 위해 곡을 만들기 전에 2AM이라는 그룹이 가지고 있는 시장에서의 위치라든가 방송에서의 이미지들을 놓고 오랫동안 분석하고 연구했어요. 그러다가 나온 게 ‘죽어도 못 보내’라는 가사였고요. 그때가 지난해 추석이었는데 부모님 집에 갔다가 친구들이랑 밤새도록 술 마시느라 결국 차례도 못 지냈거든요. (웃음) 그렇게 술 마시던 중에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라는 가사가 주루룩 떠오른 거죠. 그런 다음 멤버 하나하나에게 각자 맞는 가사와 역할을 부여한 거고요.

변영주: 어떻게 보면 작곡가보다는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이 더 메인이었던 셈인가요.

방시혁: 맞아요. 프로듀서 방시혁이 지시를 내리면 작곡가 방시혁은 그에 따라 멜로디와 가사를 쓰는 거죠. 백지영씨의 <총 맞은 것처럼>도 마찬가지예요. 무엇보다 그녀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이 최우선이었으니까요.

표절은, 창작자의 영혼에 달린 문제

변영주: 애초 저는 독립영화를 하다가 충무로에 들어와서 손톱만한 성공과 손바닥만한 실패를 경험한 뒤(웃음)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과 대중이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다를까?’라는 화두로 고민한 세월이 몇년간 있었어요. 그러다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소설이나 음악처럼 다른 영역에서 대중을 만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어떻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대중의 요구에서 균형점을 찾고, 산업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죠. <죽어도 못 보내>라는 미니 앨범을 들으면서 느낀 것도 그거예요. ‘이 사람은 그 긴장을 즐기나?’

방시혁: 저는 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렸을 때 학급에 보면 그런 애들 있잖아요. 다리 한쪽은 날라리에 걸쳐 있고 한쪽은 모범생에 걸쳐 있는. 20대에 대중음악계에 들어와서도 그랬어요. 상업적으로 대단히 성공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미국의 대중음악을 주로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쟤는 외국에서 살다온 애야?’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요. 이제는 또 상업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제작자이면서 한편으로는 또 지식인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동경하고 있죠. 그렇게 항상 중간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 같아요. 문제는 그렇게 다른 욕구들이 평행하게만 유지되는 게 또 아니더라는 거예요. 특히 지식인의 위치에서 무언가 할 말은 하겠다는 입장과 상업적인 제작자로서 성공하려는 욕망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날 때가 많아요. ‘대중의 욕망과 내 욕망의 긴장은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좀 치졸한 것 같아서 싫긴 해도, 항상 같은 답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쩜 그렇게 자로 잰 듯 당대의 요구에 따른 노래와 가사가 아니면 안 받아들여주시는 지 모르겠어요. (웃음) 사실 1위 곡을 썼으면 한번 정도는 10위를 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1위를 하고 그 다음에 50위를 하게 되면 그것 하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오기로 했던 음반들도 못 나오게 되는 거예요. 욕망을 조율하기에는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요.

변영주: 노래로 대중을 만나는 것 외에도 블로그라든가 SNS를 통해서 본인의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하시는데요. 그렇게 대중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건 두렵지는 않으세요?

방시혁: 두렵지는 않아요. 제가 천성적으로 오지랖이 넓은데다(웃음) 때려죽여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쪽이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궁극적으로 그거예요. 모두 제자리를 찾아주자는 것.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들 똑같은 이야기만 해요. ‘아이돌 일색의 차트가 문제야’라고. 하지만 그 지점을 하나하나 따져서 공과 과를 따지는 노력은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사실 아이돌 덕분에 사람들이 음악을 더 소비하고 열심히 듣게 된 측면이 분명히 있어요. 과거에는 그냥 오며가며 노래 듣고 가사 외워서 노래방에서 부르는 게 음악을 소비하는 형태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대중이 아이돌을 사랑하게 되면서 노래 또한 그들의 일부분으로서 애착을 가지게 된 거죠. 그리고 사실 한국의 차트에 오른 음악들은 빌보드와 비교해봐도 천편일률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매우 다이내믹한 편이죠. 표절문제도 그래요. 전문적이지 않은 평가와 진단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그런 논란들은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확대재생산되고요. 비판은 많지만 실제로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인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 부분에는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거죠.

변영주: 말씀하신 대로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표절시비인데요. 그 기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방시혁: 얼마 전에 배철수씨가 하신 말씀에 원론적으로 동의해요. 창작자의 영혼에 달린 문제죠. 사실 표절여부는 당사자가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누구도 가려낼 수 없어요. 거기에 또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몇 마디가 같으면 안돼’라는 식으로 재단하는 것도 옳지 않고요. 8마디가 똑같은 전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어요. 본인이 아니면 진실을 모르는 문제이니만큼 아티스트들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변영주: 누군가가 저에게 지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 음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어린 나이에 너무 냉소적인 음악을 하는 게 더 걱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팬으로서의 우려인데, 저는 지드래곤이 좀더 ‘핫’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방시혁: 지드래곤이 냉소적이라면, 어린 나이에 대중의 욕구를 너무 잘 안다는 뜻일까요?

변영주: 아니요. 저는 <소년이여>나 <코리안 드림>의 가사처럼 ‘너희들이 날 싫어하는 거 알겠지만 내 스타일대로 가겠어’라는 태도가 냉소적으로 보인다는 거죠. 사실 좀더 억울해해도 좋을 것 같은데. (웃음)

방시혁: 사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미 15년쯤 전에 미국의 흑인들이 정립한 거예요.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한국의 인디 신에서 숙성된 다음 이제 메이저에서도 받아들여진 셈이죠. 그래서 그런 화법을 마이클 잭슨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했던 것처럼 ‘지드래곤이 억울했나보구나’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쿨한 남자, 냉소, 섹스의 코드가 상업적인 음악의 표현 형태로서 당대에 받아들여진 거죠.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에요. 예전에 칼럼에도 썼듯이 ‘지드래곤은 진짜 천재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솔로 음반을 너무 급히 내게 된 것 같아 답답했어요. 빅뱅 앨범 3장을 만들고 바로 솔로 앨범을 낸 거잖아요. 저만 해도 1년 동안 쓰는 곡이 몇곡 안되는데, 이 친구는 몇 십곡을 쓴 거예요. 그렇게 아이디어가 고갈된 상태라면 당대의 트렌드를 답습하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라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사실 지드래곤은 그런 음악을 하지 않아도 <거짓말>처럼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코드의 음악을 해도 성공할 에너지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못하죠. 이미 상업적으로 완숙해져서 어떤 코드들을 제 색깔과 섞어서 대중이 듣기 좋게 만드는 능력은 있어도 그만한 에너지는 없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지드래곤의 솔로 앨범은 과거 <거짓말>처럼 ‘허억, 어떻게 이런 걸 했지?’라는 느낌이 아니라는 거죠. 능력이 있는 친구인데, 솔로 앨범에 좀더 공을 들일 수 있도록 왜 시간적으로 배려해주지 못했나는 점이 정말 아쉽죠.

신인 작곡가 위한 기회 줄고 있어

변영주: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몇년마다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이 있어요. 제 경우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들이라든가 <대부> <졸업> 같은 작품을 때때로 다시 보면서 왜 제가 영화감독이 되려 했던가를 다시 떠올리거든요. 작곡가 방시혁을 있게 한 음악들은 어떤 노래들이었을까요?

방시혁: 제가 어렸을 때 큰 감명을 받고 지금까지도 2년에 한번씩 듣게 되는 음악들은 레드 제플린 같은 60년대 하드록이에요. 어린 시절에 레드 제플린의 <Since I’ve Been Loving You>를 듣고는 정말 무언가가 다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그 때문에 기타도 배우고 그랬는데 사실 그 음악들이 작곡을 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았어요.

변영주: 영향을 받는다는 건 스타일을 좇는다기보다 태도를 배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영화로 치자면 ‘감독은 아마 이런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찍었을 거야’라고 상상하는 식으로.

방시혁: 사실 저는 록 계열은 많이 듣지도 않거든요. 그럼에도 60년대 하드록에는 강한 향수가 있어요. 한국 음악 중에서는 유재하씨의 모든 노래들을 정말 사랑했고요. 어릴 때부터 외국 음악만 듣고 자라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은 잘 모르는데, 유재하씨 음반 나오던 그 무렵 1년 반 동안은 <어떤 날> 같은 음악도 많이 들었어요.

변영주: 또 유재하 가요제로 음악계에 데뷔하셨잖아요.

방시혁: 제 이력만 보고 뭔가 화려한 스토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실은 전혀 안 그래요. 유재하 가요제도 사실 처음에는 안 나가려 했었어요. 저는 상업적인 음악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요제 성격과 맞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동상을 주니까 또 서운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당시에 상 받으러 나가면서 다들 기뻐하는데 혼자 인상 쓰고 있었대요. 어쨌든 그렇게 커리어가 시작되었는데 몇년간은 개점휴업 상태였죠. 그러다 우연히 박진영씨의 눈에 들어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그때도 사실 시큰둥하게 반응했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이래야 마땅한데 “생각 좀 해보고요” 그랬으니. (웃음) 어쨌든 그렇게 JYP에서 일하면서 작곡가·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까 이야기한 상업성에 대한 고민은 크게 안 해도 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클라이언트인 박진영씨의 요구에만 부응하면 되었고, 박진영씨의 요구는 “한국에서 제일 ‘뽀대’나는 걸로!”였으니까요. (웃음)

변영주: 그 사이에 음악시장 환경도 크게 바뀌었잖아요. 앨범 단위로 프로듀스할 때와 싱글 한곡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작업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방시혁: 일단 시장이 그렇게 변한 것 자체는 바람직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정말 강매에 가까운 형태로 음악을 팔았잖아요. 달랑 한곡 들으려고 비싼 앨범을 사야 했으니까. 미리 서너곡을 듣고 충분히 검증한 다음 정규 음반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싱글 제도는 그런 점에서 장점이 있다고 봐요. 개별 곡 작업에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예전에 음반 만들 때는 곡과 곡 사이의 공백을 몇초로 하느냐, 곡이 끝날 때 페이드 아웃은 어떤 형태로 가느냐도 정말 중요했거든요. 곡 순서 배치는 물론이고요.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음반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잖아요. 앨범을 사도 mp3로 추출해서 들으니까, 그런 프로세스들이 의미가 없죠. 산업적으로 보자면 그런 측면도 있어요. 앨범 단위로 음악을 만들 때는 모든 곡들을 일류 작곡가에게 맡길 수가 없었잖아요. 너무 비싸니까. 그래서 한두곡을 인기 작곡가에게 받고 나머지는 가능성있는 신인 작곡가들에게 기회를 줬어요. 업계에서는 ‘깔 곡’이라고 부르는데, 싱글이 일반화하면서 깔 곡의 입지가 줄어들고 신인 작곡가들이 데뷔할 기회도 같이 줄어들게 되니, 아무래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된 측면이 있죠.

산업 자체가 ‘핫’ 해져야 수익모델 개발도

변영주: 7~8년 전쯤 베를린영화제에 갔다가 거기서 고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요. 놀라웠던 건 제가 한국 사람인데도 외국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 영화를 낯설어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말하자면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는 거죠. ‘왜 우리는 그분들의 지혜를 배우지 못했을까?’라는.

방시혁: 음악쪽은 더 심한 것 같아요. 이식 문화론이 철저히 맞아떨어지는 구조랄까요. 그리고 영화계는 분명 어떤 세대만큼은 스스로 독창적인 영역을 개척해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음악은 철저하리만치 세대가 단절되었고 흥행을 위해 미국산 음악과 스타일을 수입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변영주 :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글로벌하게 당대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건 한국의 대중음악밖에 없는 것 같아요. 방시혁 : 그랬던 시기가 과거에 또 있었죠. 신중현씨가 등장했던 때. 그분은 완전히 당대의 음악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산울림도요. 우위를 매길 수는 없겠지만 그분들의 음악은 정말 달랐다는 느낌을 주었어요.

변영주: 그때의 당대성은 그분들에 국한된 거였잖아요. 지금은 전체 음악산업이 글로벌해졌다는 느낌인데요.

방시혁: 그 부분은 저도 느껴요.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제가 쓴 곡들이 차트 1위에는 올라도 국민적인 호응을 받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총 맞은 것처럼> 이후 한국에서 가장 ‘핫’한 작곡가처럼 되었는데, 이 변화도 그런 부분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어릴 때부터 저는 항상 똑같은 음악을 해온 셈이거든요. 당대의 미국 음악. 그게 과거에는 낯설었어도 스타일리시해서 호응을 얻었다면, 지금은 대중도 완전히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놀라우리만치 세계와 똑같은 수준으로 가고 있어요.

변영주: 그렇죠. 언젠가는 이 시기의 한국 음악이 진정 글로벌했던 순간으로 평가받는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mp3 불법 다운로드로 바닥을 쳤던 음악시장이 극적으로 비약에 성공했다는 느낌도 있고요.

방시혁: 비약에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배가 고파요. (웃음) 물론 저도 외부에 강연을 나가면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요. 바닥을 쳤고, 변화의 방향타가 긍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고요. 하지만 산업적인 부분들을 돌아보면 답이 참 안 나와요. 말씀드린 것처럼 상업적인 요구와 개인적인 욕망의 경계에서 과감히 개인을 버리고 요구에 부응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웃음) 활로가 잘 보이지 않아요. 어쨌든 긍정적인 징조들은 분명히 많아졌어요. 아이돌이라는 존재도 큰 역할을 했고요. 당장 돈이 벌리지 않더라도 산업 자체가 ‘핫’해지면 사람들은 그곳을 쳐다보게 되니까요. 그러다보면 수익에 관한 아이디어들도 차례로 생겨나겠죠.

변영주: 다시 ‘단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면 젊은 참가자들에게 배리 매닐로의 노래를 부르게 하거든요. 그런데 과연 <슈퍼스타 K>에서 송창식이나 사월과 오월, 유재하의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한국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런 음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구나’라는 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이건 결국 영화계 후배들에게 어떻게 제가 체득한 지혜들을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는 부분인데요.

방시혁: 그와 관련된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나 감독님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구체적인 작업들이 선행되어야겠죠.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하반기에는 케이블에서 제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하려고 해요. 사실 전문적인 음악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이렇게 뜨거운 감자를 건드리는 데는 없잖아요. <제리 스프링어 쇼>처럼 해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웃음)

변영주(1966년생)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대학원 졸업. 1993년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메가폰을 잡으며 영화계 데뷔. 이후 세편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2> <낮은 목소리3-숨결>과 두 편의 극영화 <밀애> <발레교습소>를 연출했으며 김동원 감독의 <송환>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했다. 현재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차>의 크랭크인을 준비 중.

방시혁(1972년생) 서울대학교 미학과 졸업. 1997년 제6회 유재하 가요제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계에 데뷔했다. 이후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작곡가·프로듀서로 활동하였으며 2005년에 독립하여 자신의 회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 주요 작품으로 god의 <하늘색 풍선>, 비의 <I do>,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내 귀에 캔디>,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 2AM의 <죽어도 못 보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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