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세상과 화해하는 법 <폭풍전야>
이영진 2010-03-31

synopsis 살인죄로 복역 중인 수인(김남길)은 AIDS 감염자라는 이유로 다들 멀리하는 상병(정윤민)에게 접근한다. 수차례의 탈옥 전력이 있는 수인은 AIDS에 감염되면 곧 출소한다고 믿고 있다. 수인은 상병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의 피를 몰래 수혈한다. AIDS에 감염됐다고 해서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수인은 입원 치료 도중 결국 탈옥한다. 세상에 나왔지만 제대로 된 복수를 하지도 못하고 쫓겨다니던 수인은 결국 상병이 소식을 궁금해했던 여인 미아(황우슬혜)의 카페에 찾아든다.

<피터팬의 공식>의 한수는 억울하다. 엄마가 ‘허무하다’며 살충제를 마시고 병상에 누워버린 뒤로 한수는 빚 독촉에 시달리는 신세가 된다. 그만둔 수영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수는 그저 고통스런 자신의 열아홉을 감내해야 한다. <폭풍전야>의 수인은 한수가 가진 사정보다 더하다. 수인은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폭풍전야>는 조창호 감독이 선보이는 두 번째 마술이다. 그의 데뷔작 <피터팬의 공식>이 손안의 동전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었다면(한수와 같은 10대의 성장통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라는 데 동의한다면), <폭풍전야>는 그보다 몇 곱절 어려운 마술을 택한다.

<피터팬의 공식>에서 인물들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대면했다. 반면, <폭풍전야>의 수인과 미아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죽음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모두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병을 얻었다. 수인은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 미아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두 사람이 기대했던 생은 펼쳐지지 않는다. 수인의 복수 대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미아의 사랑은 제 발로 감옥에 걸어들어갔다. <폭풍전야>는 이 지점에서 묻는다. 죽음밖에 남지 않은 두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의 마지막 마술은 무엇이냐고.

그렇다고 <폭풍전야>가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일부러 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따금씩 그들이 ‘위험한’ 보균자라는 사실을 전해주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폭풍전야>는 ‘천형이라고 여기는’ AIDS 감염자들의 안타까운 사랑의 결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단적으로 후반부에 수인과 미아가 동시에 쓰러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폭풍전야>는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또한 수인과 미아는 서로 비밀을 알게 된 뒤에도, 서로에게 갖고 있는 호감을 입으로, 몸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적 사랑은 계속 지연되고, 맨 마지막에야 등장한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상병이다. <폭풍전야>는 상병이 미처 성공하지 못했던 마술을 수인과 미아가 대신 끝마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직 마술사였던 상병은 수인에게 “마술을 하려면 속임수와 진짜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앞서 수인에게도 “고난이도 마술을 다 배우고 나면 내가 시시해질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니까 수인에게는 미아가 진짜 사랑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미아에게는 수인이 영원히 시시하지 않을 사랑이어야 한다는 확증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과거를 지우고 웃으며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후반부는 흡사 김기덕의 <빈 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폭풍전야>는 판타지의 기운을 빌려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넌지시 제시하는데, <피터팬의 공식>의 마술보다는 좀더 따뜻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