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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은밀한 연애편지를 쓰고 싶었던 거 아닐까
윤성호(영화감독) 2010-04-16

<지붕뚫고 하이킥!> 김병욱 PD의 선택에 주석을 달다

“내가 쓴 새 소설에는 당신을 쏙 빼닮은 인물이 등장해요. 내가 그 인물에게 들이는 정성을 본다면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거예요. 그 인물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주게 돼요. 내가 상처받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우정은 참 이상한 데가 있지요.”-안데르센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안데르센 평전>(재키 울슐라거 저, 전선화 역) 중에서

시네필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는 간만의 외식, 모니터로 지켜보는 시트콤은 일용할 양식이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경험을 기억에 남을 섹스에 비유한다면 괜찮은 시트콤은 일상에서 꾸준히 도닥이는 스킨십에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살가움의 정도가 다른 그런 거. 때문에, 주에서 달로, 월에서 분기로, 여러 에피소드를 습관처럼 함께한 시트콤의 배우를 다른 매체에서 마주칠 때면 낯선 여행지에서 동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도 신기하다. 잭 스나이더의 피칠갑 데뷔작 <새벽의 저주>의 얌체 한량이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의 허당 사위였다든지, 코언 형제의 신작 <시리어스 맨>의 젊은 랍비가 <빅뱅 이론>(TV)에서 하악거리던 유대인 공학자 하워드라는 사실 등등 왠지 ‘식구끼리’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이음표들.

무엇보다 열렬히 애호하는 미국 드라마 <오피스>(The Office)에서 천태만상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시리즈 속 캐릭터와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그 소우주 바깥의 서사에 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묘하다. 응원하는 선수가 다른 리그에 이적해 뛰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더 큰 물에서도 경력을 쌓는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머슬머슬하다. 가령, 여섯 시즌째 팸(제나 피셔)과의 사랑을 진화시키고 있는 짐(존 크래신스키) 이 헤어스타일을 바꾼 채 <어웨이 위 고>와 <사랑은 너무 복잡해>에서 ‘다른 여자’의 신랑 또는 남자친구로 출연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내 이 자식 뜰 줄 알았지’ 하며 뿌듯한 한편 (내가 뭘 했다고) ‘그래도 저 친구는 팸이랑 커플인데’ 하며 어색하기도 하다. 목욕탕에서 연속극 악역 배우의 등짝을 때리는 아줌마들이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늦은 고해성사를 전하고 싶기에

우리나라에도 좋은 시트콤이 많지만, 외국의 다섯 계절 분량을 한 계절에 소화해내는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인지 에피소드의 편차가 크다. 다시 스킨십에 비유하자면 그 손길이 잦은 대신 지구력이 짧은 셈. ‘급’정들었다가 ‘급’헤어지는 과정에서 점점 비열이 낮아진다. 그런 온도차 극복을 위해 아침드라마 느낌의 러브라인이 등장하는 듯도 하고….

장인의 ‘스타일’이라는 게 그런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기기도 한다. 절창에 가까운 김병욱 PD의 작품들이 그 증거. 물론 더 좋은 환경에서라면 그 이상의 작품들을 만들어냈겠지만, 상대적으로 연출자의 자율성이 낮은 TV 환경에서 그가 선보인 전형적인 인물 군상과 단출한 표현방식은 어쩌면 쓸 수 있는 패가 별로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많은 변수를 만들어내려는 노력 아닐까. 이럴 땐 될 듯 말 듯 연애 이슈도 효용이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볼 때는 러브라인에 대한 집착이 그런 재활용 충전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의 사랑놀음은 또 다르더라. 그러니까 이게 그저 놀음이 아닌 생계(더불어 존재의 큰 부분을 잃고 살던 사람의 회생)와 관련된 사안. 결국 마지막회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10초 이상의 완전 묵음을 디민다. 사운드 전공자들이 놀랄 일. 말 그대로 ‘텅’ 비우는 순간.

시리즈의 끝을 둘러싼 수많은 가설에 뒷북으로 끼려니 민망하지만, 왠지, 감히, 멋대로, 김병욱 PD의 선택에 주석을 달고 싶어졌다. 유통이 서사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요지경 산업 속에서 드물게 작가(auteur)의 반열에 오른 분들이, 종종 괴이한 엔딩을 선사해, 그 서사를 공유했던 ‘소비자’의 원성을 무릅쓰는 이유는, 어쩌면 애초부터 개인적이고 은밀한 연애편지를 쓰고 싶었던 때문 아닐까.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가 있었을 때, 굳이 예비하곤 했던 빠져나갈 틈들- 그렇게 일찌감치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은 지금을 너무 후회한다고, 그때 나의 비겁함은 팔할이 부덕의 소치지만 나머지 이할은 세상의 견고한 질서가 두려웠던 탓도 있다고. 늦은 고해성사를 기어이 전하고 싶기에 지난하게 이끌어온 자신의 공공연한 과업에 어떤 얼룩을 남기는 선택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온갖 모둠을 웃기고 울린 그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실은 내 심연을 당신이 주목하도록 하려는, 또는 스스로 확인하려는 골드버그 장치.

세경이랑 인어공주는 은근히 닮았어

다만 시청자 입장에서 애꿎은 준혁 학생이 된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패를 쥔 사람 뒤에서, “그럼 저한테 왜 그러신 건데요? 왜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건데요!” 황망하게 소리지르는(여기서 영화 <파주>가 겹친다). 하지만 이 서사의 조물주 입장에서는, 분기를 넘기며 방청객을 웃기고 울렸으니 ‘한번쯤 내 어떤 시절 혹은 엄연한 계급의 간격을 애도하는 커브를 틀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반문할 수 있겠다. 이런 결말의 대선배 안데르센은 디즈니 콘텐츠와는 결말이 전혀 다른 동화 <인어공주>를 출판하며 책머리에 지레 도전적인 서문을 싣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더이상 이런 동화를 쓰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내가 동화로 황금새를 잡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주겠죠.’ 그의 육필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인어공주가 말하는 결말에 삭제 표시가 되어 있단다. “저쪽 세상에서는 내 모든 마음을 다준 그와 다시 하나가 될지도 몰라.” 그러고보면 세경이랑 인어공주는 은근히 닮았다. 앞에서 보면 조신하고, 거리 두고 보면 관능적이고, 위에서 보면 초라하고, 옆에서 보면 기념품 같고, 무엇보다 뒤에서 보면 먹먹한 코펜하겐의 인어상도 그 서사의 팬들로부터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냉온탕을 왕래하며 털린 마음을 봉합해주지 않는 조물주의 강박을 관람객은 어이없다 탓하지만, 작가의 그런 증상이야말로 여러분이 사랑했던 시리즈의 정체성. “끝을 이렇게 맺다니, 변태!”라고 외치는 분들도 있지만, 근데요, 이 ‘변태’의 우울증이야말로 당신이 애호한 시리즈를 낳은 조건에 포함되어 있던- 또는 조건 그 자체였던- 거 아닐까요. 괜한 우연이 아닌 납득 가는 질서. 에휴, 돌고 돌아 하고픈 말은 늘 그렇듯 뻔한 이야기. 입술을 깨물며 많은 말을 참는 세경이보다는 이 빵꾸똥꾸야 어케 나를 떠나니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해리가 되고 싶어라. 사랑받고 후회하는 지훈 삼촌보다 사랑 주고 엉엉 우는 준혁 학생이 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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