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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확 질러줘야지

야심은 창대했으나 대담하지 못한 옴니버스영화 <원 나잇 스탠드>

<원 나잇 스탠드>는 에피소드 세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다. 살짝 놀란 것은 저예산이라는 소문에 비해 수일한 완성도, 표현수위가 경계를 넘나드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이 꼬드기는 것처럼 야한 영화는 아니지만 민망한 지점까지 파고들어가 다른 걸 건져내려는 의지가 보였다.

민용근이 연출한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청년은 같은 빌라에 사는 여대생의 생활을 훔쳐 듣는데, 청진기를 그녀 집 벽에 대고 그녀가 샤워하는 소리 따위를 훑으며 그녀 몰래 그녀를 스토킹한다. 시각 대신 청각과 후각을 동원해 짝사랑을 이어가는 그의 행각은 심지어 연모하는 여대생이 버린 쓰레기 봉투에서 생리대를 꺼내 냄새를 맡기까지 한다(그것보다 더한 행동도 하는데 차마 말하진 못하겠다). 청년의 빌라에 사는 또 다른 여자는 사고로 눈가에 상처가 생긴 모양으로 외출을 삼가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채 기존의 모든 관계를 끊고 칩거하는데 우연찮게 여대생을 스토킹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첫 번째 에피소드는 누군가를 스토킹하는 반(半) 장님 청년의 행각을 지켜보다가 결국 그와 원 나이트 스탠드하게 되는 이 선글라스 낀 여자의 이야기다.

보지 못하는 그가 그녀를 스토킹하는 것을, 또 다른 그녀 선글라스 낀 여자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의 극대화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킹 비슷한 광경을 체험하게 만든다. 감독 입장에선 그저 그런 평범한 빌라의 공간에서 컷을 나누고 반강제적으로 근접거리에 있게 된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심리적 친밀감을 동시에 갖게 된다는 설정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것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바스락거리면 곁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될 상황에서 주인공 청년은 빌라 층계에서 남자친구를 불러들이는 여대생의 행각을 청각으로 따라간다. 라면을 먹자며 남자친구를 집으로 들인 여대생이 섹스하는 소리를 벽에 대고 청진기로 듣는 것을 선글라스 낀 여자는 옆에서 지켜본다. 청년은 모든 신경을 여대생의 동정에 쏟느라 바로 옆에 선글라스 낀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차여차한 이유로 청년이 선글라스 낀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될 때 그를 이번에는 자기 집으로 들인 선글라스 낀 여자가 그에게 묻는다. “너, 변태니? 말해봐. 변태야?” 청년은 순순히 “네”라고 그녀의 물음에 긍정해버린다. 가타부타 중언부언하지 않고 스스로 변태라고 인정하는 이 절실한 체념이 선글라스 낀 여자의 결핍을 자극했던 모양으로 두 사람은 그 대목에서 원 나이트 스탠드한다.

심리적 폐쇄성이 육체적 교접으로 탁 트이지 못하고

멋진 이야기다. 차이와 결핍을 인정하는 것, 그로써 욕망이 열리는 것을 이 에피소드는 마침내 폭발하는 청년과 선글라스 낀 여인의 섹스로 화룡점정한다. 그때까지 아슬아슬하게 겨우 지탱되던 긴장감이 이 섹스장면에선 뭐랄까, 관습적인 앵글로 환원된다. 꽤 담대하게 풀어간 설정이었는데도 여기서 폭발하지는 못한다. 이는 창작자의 의지나 능력 외에 심의체계의 한계도 작용한 탓이라고 보지만 그때까지 조여 있던 이들의 심리적 폐쇄성이 육체적 교접으로 탁 트이게 되는 레벨을 보여주지 못한다. 엄연히 보여주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기 위한 방도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 에피소드의 끝에서 여하튼 결말은 맺어지고 청년은 자신이 이제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인다. 그가 지팡이를 사용해 외출하는 것을 창가에서 보면서 선글라스 낀 여인도 얼마간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념적인 해소로 무마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육체의 결핍을 자각하고 육체적 교접으로 어떤 출구를 찾아내는 주인공들을 보여주기 위해선 정면성의 원칙이라고 할까, 있는 그대로 일상적인 앵글로 그려내면서 거기서 내밀한 폭발을 끌어내는 어떤 앵글을 찾아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이는 부부간의 단절을 그린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간간이 확인되는 부분인데, 레즈비언이라 의심되는 부인의 행각을 꿈속에서 보게 되는 남편의 혼란을 그린 이 작품에서 욕망의 결핍은 소통의 단절에서 기인한다는 측면을 본다. 이것은 요약하면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는 발상이며 에피소드 전체를 꿈속의 꿈처럼 그려냈다고 해서 예민한 구성으로 보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꿈속에서이긴 하지만 남편이 알게 되는 아내의 모습은 욕망에 능동적이며 심지어 레즈적 정체성도 갖고 있다.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가 다른 이면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남편은 물론 꿈 속에서 엄청난 혼란과 분노를 느낀다. 꽤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법조인으로 보이는 남편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육두문자 외에 별달리 자신의 심경을 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그게 다 꿈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결말부에서 그런 의문은 그럭저럭 해소되지만 부부간에도 털어놓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하는 이 관계의 불능성은 욕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고 있는 아내의 이미지를 통해 꿈속의 가정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통한다는 강한 암시를 준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연인관계나 부부관계에서 궁극적으로 소통이 힘들다는 진술도 액면 그대로는 새로울 게 없다. 문제는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육체성의 전시에 그치는 묘사가 아니라 상대의 육체와 마음을 다 접수하기 위해 파고드는 그런 절실함을 이 작품에서의 유사 관능적인 묘사가 감당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상당한 세련미를 겨냥한 구성과 디테일을 겨냥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도 뭔가 휙휙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육체성을 그냥 전시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남편의 결핍, 이를테면 꿈속 상황이긴 하지만 아내의 친구가 아내와 첫 경험을 나누었을 때의 느낌을 알려줄 때 남자의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파고드는 황홀감을 말하는 장면에서 화면은 언어를 따라가지 못한다. 남편의 결핍과 아내의 환희가 대비되는 이 장면은 남편의 결핍은 곧 아내의 결핍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관념의 차원이지만 육체성의 매개를 전제로 한다는 소재에서 이 작품 역시 뭔가 관객을 압도할 만한 이미지를 건져내지는 못했다.

산뜻하나 전체의 일관성과 연출의 강약 놓친 세 번째

마지막으로 가장 경쾌하고 재미있게 연출된 세 번째 에피소드는 외국인 게이 평론가를 단골로 두고 있는 때밀이, 이른바 목욕관리사 청년의 해프닝을 다루고 있는데 시종일관 내레이터의 해설이 깔리는 무성영화적 호흡으로 연출된다. 외국인 평론가가 한국식 목욕탕에서 때를 밀려 쾌감을 느끼는 초반 장면에서(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의 풍만한 엉덩이가 보인다) 남자의 육체를 탐색하던 카메라는 목욕관리사 청년이 외국인 평론가의 초청을 받아 부천영화제에 가고 그가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청년이 겪는 게이포비아 현상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다.

가장 야심이 적어 보이는 이 에피소드는 그만큼 가장 대중적인 재미가 있고 짐짓 심각하게 흐르던 영화 전체의 톤을 외견상 산뜻하게 마무리한다. 옴니버스영화에는 치명적이라 할 톤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것 외에도 마지막 에피소드는 연출호흡의 강약배분에 문제가 많다. 스케치하듯 흐르던 화면이 주인공의 게이포비아를 다루는 대목에선 두 남자의 정서적 연결고리를 꿰어내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에피소드가 성공한 듯이 보이는 건 역설이지만 감독의 야심이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이는 없으나 거부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한 긍정의 언설을 일정한 레벨에서 주장하고 있으며 그만큼만 관객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전작 에피소드 두편은 야심은 창대했으나 대담하지 못했다. 악전고투 끝에 괜찮은 완성도를 갖춘 영화에 대해 야박한 평가일지 모르나 규모에 상관없이 잘된 영화는 결국 관객을 압도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인 몇개의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느냐는 문제는 모든 스토리텔링 영화의 깊이를 가늠하는 필수적인 숙제다. <원 나잇 스탠드>는 고지에 근접했으나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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