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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

시차적 상황과 계급모순

‘시차’란 특정한 천체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가령 지구에서 특정한 별의 위치를 관측한다고 할 때, 그 별의 위치는 지구가 공전궤도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에 있을 때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지구에서 그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곤 한다. 시차는 우리의 일상에 속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령 무대 중앙에서 노래를 하는 가수가 왼쪽 관객에게는 오른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오른쪽 관객에게는 마치 왼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페미니스트, 생태주의자, 그리고…

천문학의 ‘시차’란 관찰 위치에 따른 대상의 ‘상대적’ 위치 변화를 의미한다. 그저 주관적으로 다르게 보일 뿐 대상 자체가 객관적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은 이보다 더 복잡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가령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즉 동일한 대상이라도 관찰자 A와 B가 볼 때 각각 객관적 상태 자체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무대 위의 배우가 실제로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볼 때는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격이랄까?

천문학의 ‘시차’에는 논리적으로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다. 관찰자 A와 B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려 그 차이 덕분에 관찰대상이 되는 천체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A와 B의 시차는 종합에 이를 수가 없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나아가 서로 모순되는 두개의 기술뿐이다. 물리학에서 빛을 입자이자 파동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인간의 조건’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이를 ‘이율배반’이라 불렀다.

정치에 관한 담론도 이와 유사한 곤혹스러움을 낳곤 한다. 가령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두개의 적대적 계급으로 나눈다. 이른바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사고를 하는 그들에게 때로는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이 배불러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먹고살기조차 힘들고, 먹고살 만한 배운 여자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운동은 당연히 부르주아적 한계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이게 어디 사회주의자들만의 생각이겠는가? 언젠가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당내 여권주의자들을 질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눈에 그저 ‘조개’만큼 사소한 것이 다른 눈에는 ‘해일’만큼 중대한 사태일 수 있다. 가령 페미니스트들은 사회를 두개의 성으로 나눈다. 이른바 ‘성적 차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의 눈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역시 때로 남성 독재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일 거다. 아주 오래전에 이 잡지의 취재팀장을 지낸 최보은씨는 운동권 출신이었던 당시의 남편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당당하게 폭로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가 있다. 가령 생태주의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세계를 ‘인공과 자연’으로 나눈다. ‘자연 대(對) 인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 좌우의 문제는 그저 부차적 대립, 결국 자연정복의 산물을 어떻게 나눠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좌파는 그 산물을 사회적으로 분배하자고 주장하고, 우파는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자고 주장할 뿐, 자연을 ‘자원의 보고’로,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데서는 둘 다 공범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가령 몇년 전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생태주의자와 사민주의자의 논쟁을 생각해보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

흔히 ‘포스트모던’이라 칭해지는 여러 담론의 바탕에는 강한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깔려 있다. 무정부주의자의 입장은 어떤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에게 아마도 좌와 우의 대립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 거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어차피 근대적 권력이 낳은 쌍생아일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는 유감스럽게도 그 어느 체제보다 강력한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실 민주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촛불을 생각해보자. 전통적 좌파에게 촛불집회는 그저 부르주아적 한계 내의 자유주의 운동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촛불대중이 자기들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대중을 광장으로 부른 이유 중 하나는 ‘쾌락’, 즉 어떤 상부의 지시 없이 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에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모인 데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이 무정부주의적, 자율주의적 욕망의 주체들은 외려 자신들을 지도하려 드는 전통 좌파들이 자신들의 오른편에 있다고 느꼈을 거다. 실제로 촛불대중은 현장에서 운동권식 지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유의 새로운 습관

전통 좌파는 촛불대중이 오른쪽에 있다고 느끼고, 촛불대중은 외려 전통 좌파가 오른쪽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주관적 느낌의 차이에 불과한 게 아니다. 촛불대중이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는 상황, 그리고 전통 좌파가 촛불대중의 오른쪽이 있는 상황은 주관적 평가라기보다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 가깝다. 촛불대중은 ‘실제로’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고, 동시에 전통 좌파의 왼쪽에 있다. A가 B의 왼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차적 상황이다.

여기서 “A도 옳고, B도 옳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 이 두 입장이 때로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동시에 파동이자 입자다.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을 부정하나, 그러면서도 둘 다 빛에 대한 올바른 기술이다.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가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