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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윤성호(영화감독) 2010-08-13

7월의 마지막 주를 보내다가 문득 든 단상들

보다시피 <씨네21>의 앞쪽과 뒤쪽에는 단신들이 모여 있는(편집되어 있는) 페이지들이 있다. 가령 이다혜 기자님이 맡고 있는 듯한 새로 나온 책 소개라든지, 신두영 기자님이 맡고 있을 게 분명한 ‘신두영의 시사중계석’이라든지, 잡지 말미의 독자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 종합 페이지라든지 (참, 시네마정동 심야 할인쿠폰은 체크들 하시는지? 잠이 없던 서른살 이전까지는 1년 관람작 중 태반의 경로가 이 쿠폰이었다, 그리운 정동). 기획기사나 비평, 또는 칼럼이나 인터뷰 등의 코너들이 여러 장의 지면을 차지하며 세상과 영화의 규모와 깊이를 변성기 지난 목소리로 웅변하는 유세차 같다면, 잡지의 앞뒤 이 간명한 콤비네이션들은, 뭐랄까, 그보다는 부담없이 전할 것만 전하고 지나가겠다는 우편공무원의 헛헛함 같은 게 있다. 기실 나도 그쪽이 어울린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뜬금없지만 내 멋대로 이 주의 단신 아니 단상 모음.

반성과 단속이 필요해

연말도 아닌데 6, 7월 동안 참 많은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일단 상반기를 결산하는 성격의 자리가 몇개 있었지만, 아무래도 집을 옮긴 뒤 분수보다 넓어진 공간에 비례해 밤 시간의 적적함이 커진 탓이 크다. 그걸 건강하게 메우질 못하고 어떻게든 저녁마다 한턱을 쏘거나(이놈의 객기) 추렴을 하거나 해서 알딸딸해질 궁리를 했다. 마침 소속도 없고 공부하는 터도 아니고…. 그렇게 ‘일용할’ 공동체가 없다 보니 핑계김에 모인 찰나의 소통에 자꾸 기대게 되는 거겠지. 꿩 대신 닭, 아니 닭 대신 꿩. 커뮤니티 대신 커뮤니케이션, 아니 커뮤니케이션 대신 쏘맥.

안 좋다. 몸에 안 좋고 일에 안 좋고…. ‘그래도 사람은 남지 않나’ 방어를 하기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술이 들어오는 대신 말이 나가게 마련이고 그 들뜬 말들은 만물이 그렇듯 열역학 제2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결국엔 지친다. 석잔 넉잔 댓잔…. 그래도 말이며 계산이며 나름 바로 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딱 그만큼 시야가 좁아져 안팎의 누군가에게 온갖 모양을 들킨다. 원래 속에 있는 달짝지근한 것들을 들키는 건 괜찮은데, 언제부턴가 그런 영험한 순간은 거의 못 마주치고, 대신 원래 속에 없던 들쩍지근한 것들만 취기로 빌려와서는, 그렇게 들킬 이유도 효용도 없는 것들까지 들키고서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는 새 너도나도 실제보다 안쓰러워지고 마음보다 번거로워진다. 뭣보다 그 사이 왕왕 오갔던 긴요한 말들마저 휘발된다.

얼마 전에 그런 ‘실없는 습기와 두께’가 절정 직전에 이른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까칠하고 경솔하고 발끈한 말들을 뱉어내고 아직까지 마음이 안 좋다. ‘술 한말’이라는 단위가 숫제 직유다. 술이 술을 먹고 그 술이 말을 낳고 술이 벅찰 땐 말이 술 대신 술 역할을 하는데, 이미 그건 말이 아니라 말 한술, 술 한말. 이 언덕에서 더 나가면 굴러서 내려오는 거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좀더 박절해져야겠다. 금주까진 아니어도 절주. 홍대신에서 컨트리 음악을 하는 바비빌이란 분이 “다시는 이원열과 마시지 않겠어, 커피 따윈 마시지 않겠어”라고 읊은 적이 있는데, 요걸 반대의 의지로 개사해본다. “당분간 마시지 않겠어, 만남은 커피 따위로 하겠어.” 이 못난 심정을 알 만한 분들은 부디 사시로 타박하진 말아주시길. 술자리에서 생기는 여분의 호기+습기의 쳇바퀴를 아예 끊진 못하더라도 그 지름은 줄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지름을 서로 방관하다 보면 그간 우리의 안줏거리였던 꼰대들과 별 다를 게 없을 수 있다는 반성과 단속의 필요.

무슨 교회 수련회같아

해마다 8월이면 강원도 정동진에서는 2박3일치 소박한 영화제가 열린다. 이름도 정직하게 정동진독립영화제. 해변 인근의 정동초등학교에 커다란 천으로 스크린을 펼쳐놓고 (여기부터는 정동진독립영화제 홈피의 자기소개 인용)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에서 한여름 별밤을 머리 위에 이고, 간이역을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바다 냄새, 모깃불 냄새를 맡으며 맥주 한잔 마실 수 있는 영화제’다. 뭔가 다른 취향과 신념의 영화가 소개되기 모호한 지역의 처지를 ‘이 없으면 잇몸’의 귀여운 정신으로 돌파하는 행사.

자, 여기까지가 정동진에 대한 예찬. 지금부터는 이 영화제가 내 개인의 취향과 맞지 않는 이유들의 열거. 일단 상영작들이 전체관람가. 탁 트인 공간에서 남녀노소의 관람을 권장하기에, 기준 이상의 노출이나 러브신, 폭력 묘사, 형식 실험이나 강경한 메시지는 초청받지 못한다. 따라서 정동진에서 틀어지는 작품들은 좋게 말하면 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나이브한 구석이 있다(잉, 그냥 영어로 쓰냐 마냐의 차이). 그리고 개가 주인 닮듯 영화는 연출자를 닮는 법. 정동진에는 뭔가 좀 천진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영화인이 주로 행차하게 마련이다. 그들의 소박한 담화와 건전한 교류 속에서 은근히 무뢰한인 나는 정처를 못 찾는다. 모름지기 영화제라면 평소 가진 것 없던 연출자에게 ‘감독님’이라는 상징자본이라도 일시적으로 허여하여, ‘작업’을 빌미로 서로 ‘작업’도 걸고,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을 통해 또 다른 ‘수작’도 나누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정동진에는 그런 게 없다. 일단 술자리도 커다란 교실이나 운동장 등 일종의 광장을 이용하기에 은폐 엄폐물이 없다. 그저 함께 모깃불 피우고, 해변 가서 물놀이하고 (진짜로 편을 나눠 수구를 한다), 뙤약볕에서 야구하고, 그늘에서 농구하고(<송환>의 김동원 감독님은 대단한 포워드다), 같이 옥수수 쪄 먹고 그래야 한다. 그사이 감독님도 관객님도 사무국장님의 호칭도 존재감도 다 없어지고 그냥 너나들이하는 우리만 남는다. 뭔가 다른 어페어가 없을까 잠깐 궁리라도 할라치면 ‘왜요? 친구가 없어요? 내가 친구가 되어줄게요’ 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착한 표정의 영화인들. 아, 싫다. 무슨 교회 수련회같다. 교회 수련회보다 개방적이고 문화예술적으로 고양되어 있으며 헌금도 안 걷고 무릎 꿇고 기도를 하거나 은사를 안 받을 뿐 정말 좀 비슷하다. 그러니까 독립영화인의 ‘청춘불패’같은 거다.

몇년 전이던가, 방문 이틀째에 더이상 그 무리에서 존재의 먹이를 찾는 건 나랑 맞지 않는단 생각에, 서울서부터 동행한 배우와 둘이서만 고즈넉이 해변을 거닐고 있는데, 아, 강원도의 활동가들은 몽골에서 자란 양 눈도 밝다. 저 멀리서 “자장면 왔어요! 자장면 먹어요! 자장면!”을 어찌나 외쳐대는지… 그닥 당기진 않았으나 정성을 생각해서 모래사장을 횡단해 갔더니 이미 자장면은 동이 나버렸다. 괜찮다 얘기하고 등을 돌리는 우리에게 “어떡하지? 자장면이 없네! 자장면 못 드셔서 어떡하죠? 자장면 못 드셔서 화난 거죠!” 아아… 이어 해변 구석에서 조용히 멱이나 감으려는데 또 저쪽에서 “바나나보트 타요! 바나나보트! 자리 하나 비워뒀어요, 바나나보트!” 울며 겨자 먹기로 동승한 바나나보트 위에서 사이즈 작은 구명조끼를 입고 질러대던 기억 (나는 수영을 못한다)…. 아아, 이토록 난감한 정동진. 여기서 더 난감한 의문. 너와 나의 예민한 간격을 말소시키는 이 둔감한 영화제가 왜 해가 갈수록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끄는 것인가, 왜 내가 아는 가장 예민한 영화인마저 저 나이브한 마당에 투항하는 것인가, 저 무리에 섞이는 데 또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정동진 가는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