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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박찬욱] “해외영화제를 다니면 한국영화 위한 로비스트가 필요하다 싶지요”
정리 강병진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2010-10-07

박찬욱 감독, 김동호 위원장에게 부산영화제 술자리 비화부터 미래 계획까지를 묻다

박찬욱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할 당시, 시네필의 한 사람으로서 감격했다. 그리고 몇년 뒤, <공동경비구역 JSA>로 도빌아시아영화제에 갔을 때, 김동호 위원장과 송강호와 함께 밤새워 술을 마셨던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수장인 김동호와 한명의 남자인 김동호를 두루두루 짚었다. 박찬욱 감독이 묻고, 김동호 위원장이 답하는 시간이었지만 인터뷰에 앞서 동료 영화감독과 배우들에게 질문을 받아온 박찬욱 감독은 영화인 전체의 호기심과 기대를 인터뷰에 담아냈다. 그의 질문은 끊길 듯 끊기지 않았다. 3시간가량 이어진 이날의 대화를 정리했다.

박찬욱 예전에 <취화선> 개봉할 때, <키노>에서 최민식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후로 제가 인터뷰를 해보기는 처음이네요.

김동호 저도 감독한테 인터뷰를 받는 건 처음이에요. 이제 그만둔다고 하니까 인터뷰가 많아지네요. 너무 요란한 게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됩니다. 저 친구 그만두는 게 뭐 그리 대단한가 빈축을 살 것 같기도 해서요.

박찬욱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퇴임이 한국 현대사에 별로 없으니까요. 떠들썩하게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전도 하신다면서요?

김동호 이번 영화제 기간 중에 60점 정도를 전시할 거에요. 영화제를 오가면서 찍은 사진들이니, 아마 박 감독 사진도 있겠죠. 사진전 하고 해외영화제를 소개하는 책 2권을 내면 그렇게 얼추 지난 15년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어요.

부산영화제, 그 첫 단추를 끼우다

박찬욱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작부터 여쭤보겠습니다. 처음에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이 위원장님을 찾아가기 전에, 원래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김동호 영화진흥공사에 있을 때, 종합촬영소 건립을 진행했어요. 완공을 계기로 서울에서 영화제 같은 걸 한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에 해외영화제 경험이 있는 영화인들과 회의를 한 적이 있었죠. 김수용 감독이랑 박기용 감독, 이두용 감독, 그리고 배창호 감독 등 열댓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어요. 시기나 여건상 어렵다는 거예요. 그런데 1994년 즈음 돼서 당시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이 1995년이 광복 50주년인데 이때를 계기로 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창설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왜 느닷없이 국제영화제냐며 비판여론이 많았죠. 그래서 그때 문화부가 한국평론가협회에 위탁을 맡겨서 공청회 같은 걸 열었어요. 그때 참석해보니, 긍정적인 의견이 60%, 부정적인 의견이 40% 정도 되더군요. 부정적인 이유는 그때가 1994년 여름인데, 1년을 준비해서 영화제를 연다는 게 너무 이르다는 거였어요. 그런 움직임을 같이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었죠.

박찬욱 부산영화제 이전에 가보신 국제영화제는 어디였습니까?

김동호 처음 갔던 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였어요. 영진공에 막 들어갔을 때였는데,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가 경쟁에 진출했었어요. 세르주 로직이라는 집행위원장이 영진공에 와서 영화를 다 본 뒤 경쟁에 올렸다고 해서 수상 가능성이 있는 것 같으니까, 가게 된 거죠. 그래서 임권택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당신 영화가 경쟁에 올라갔으니까 같이 가자 했는데, 자기는 안 가겠다는 거예요. 그때는 임 감독을 잘 모를 때였죠. 또 주연배우인 신혜수는 당시 KBS에서 드라마를 찍는 중이라고 못 간다는 거예요. 내가 그때만 해도 KBS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전화해서 3일만 빼달라고 했어요. 결국 그렇게 임 감독이랑 신혜수와 함께 몬트리올에 갔어요. 가서 보니까 공식상영을 넓은 극장에서 있는데 아침에 잡혀 있는 거예요. 이게 이래도 괜찮을까 싶었는데, 진흥공사 전문위원이란 친구가 해외에서는 다 그런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객석이 텅텅 비어 있으면 심사위원의 반응도 안 좋을 것 같았죠. 그래서 나름 로비를 한다는 입장에서 한국대사도 부르고, 영화제 위원장이랑 부위원장이랑 조찬도 갖고, 공보부에 이야기해서 캐나다 공보관을 몬트리올에 파견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또 캐나다 총영사에 동기가 있었죠. 차 한대와 영사 한명을 붙여줬어요. 그 영사를 통해서 몬트리올에 있는 각 교회 목사님들께 전화를 했죠. 교회가 8개인가 있었는데, <아다다> 상영할 때, 신도들의 참석을 독려해달라는 거였죠. 그런데 또 입장권 문제가 있더라고요. 구할 수 있는 게 얼마 안된다고 해서, 그냥 오면 무조건 표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관객을 동원했고, 신혜수는 한복을 입고 무대인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임 감독은 평소 관리에 대해서, 특히 영진공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는데 내가 마치 제작자처럼 챙기는 걸 보고 이런 관리도 있구나 싶었대요. 그리고 이후 <아제아제 바라아제> 때문에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 갔었죠. 다행히 두 영화 모두 여우주연상을 받았어요. 그렇게 두 영화제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어요. 영진공 사장 4년 하면서 칸이나 베니스도 갈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한국영화가 올라간 적이 없어 갈 일이 없었죠.

박찬욱 대개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사실상 수석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합니다. 위원장님 같은 경우는 행정정인 측면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신 건데, 이게 발상의 전환 같습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김동호 대부분의 집행위원장이 그렇죠. 저는 아니고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프로그래밍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봤겠죠.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모두 각 분야 전문가였으니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행정력을 갖추고 영화인들을 많이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또 마침 제가 놀고 있었지요. (웃음)

심의를 면하다, 영화라는 해방구를 열다

박찬욱 돌이켜보면 그런 역할의 분리가 부산영화제 성공의 가장 기초가 된 판단이 아닐까 싶어요.

김동호 저도 매우 좋았다고 생각해요.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영화제를 창설하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재원을 확보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교수였기 때문에 정계나 관계나 또는 경제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돈을 끌어오는 건 제가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영화제를 시작해보니 걸리는 게 많았어요. 정부, 문화관광부 같은 예산당국과도 관계가 되고, 특히 부산시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만 했죠. 그런가 하면 영화심의 문제는 당시에 공윤과 직결돼 있었고요. 모든 것이 외곽기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제 역할이나 힘이 필요했을 것 같네요. 그러니 다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처럼 수석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그제큐티브 디렉터의 역할이 맞는 것 같아요.

박찬욱 한국의 다른 영화제의 역사를 보면 그런 관료들, 지자체와의 갈등이 많이 생겨서 집행위원장들의 예술적인 고집이라든가, 취향이나 성격이 자주 충돌을 일으키고 그래서 삐걱거리는 게 있습니다. 부산영화제에 그런 갈등이 없었던 이유가 그런 선택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또 궁금했던 건, 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심의를 받지 않는데, 이것도 처음에는 아니었잖요? 그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김동호 원래는 규정상 심의를 받게 돼 있었죠. 제가 공윤에 있을 때는 대전엑스포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심의요청을 해왔기에, 그냥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영화제를 할 때도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공윤 실무자와 이야기를 해보니까 심의를 다 받아야 한다는 입장인 거예요. 상당히 고민스러웠죠. 특히 영화제에서 심의를 받는 건 아주 치명적인 거니까요. 좀 피해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대체로 영화제 한달 전쯤 상영작을 발표하는데, 정작 프린트가 들어오는 건 영화제가 시작할 때나 중간 즈음이잖아요. 그래서 심의위원들이 사전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문제가 있을 거 같아서 부산에 내려와서 심의를 해달라고 요청했죠. 그게 양해가 돼서 심의위원이 부산에 내려와서 여관에서 비디오 가지고 심의를 했어요. 그래도 어쩌다가 심의결과대로 안 했다면 그건 고발되겠지만, 집행위원장이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우리로서는 시간을 충분히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말하자면 편법을 쓴 거예요.

박찬욱 저는 그런 일이 상당히 감격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영화제라는 해방구가 생겼으니까요. 짧은 인생이지만 평생 잘리고 심의받고 검열받아서 필터링 된 것만 보라는 시대를 살다가 며칠이라도 그런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게 감격적이었던 거예요 혹시 사후에 문제가 된 건 없었나요?

김동호 물론 위반한 건 더러 있었는데, 그쪽에서 고발하지 않고 넘어간 거죠. 2회까지 그렇게 했어요. 다행히 그때 영화법시행령이 제정되면서 3회 이상 지난 영화제는 심의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이 생겼죠. 2회까지는 편법으로 하고, 3회부터는 그 조항을 적용받았어요.

박찬욱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보지만, 부산영화제가 성공한 첫 번째 이유는 위원장님을 모신 거고. 두 번째는 아시아의 새로운 감독을 발굴한다는 성격을 명확하게, 또 시의적절하게 잡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동호 주변 여건이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홍콩영화제가 아시아에서 가장 컸는데, 공교롭게도 홍콩이 1997년에 본토로 반환됐거든요. 반환 1년 전부터 이미 중국의 입김이 홍콩영화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어요. 홍콩영화제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웡아인링이라는 프로그래머가 있어요. 그런데 96년 영화제에서 중국의 독립영화들을 몇 작품 상영했어요. 그것이 중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려서 영화제 끝나자마자 해임됐어요.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에, 그러면 저 사람을 우리가 불러다 쓰자고 해서 영화제 어드바이스로 역임을 시켰죠. 그 다음에는 도쿄영화제인데, 이게 경쟁영화제이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구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비경쟁으로 가되, 아시아 신인감독의 새로운 작품에 뉴커런츠상을 주자고 했던 거죠. 도쿄영화제가 침체하고,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부산영화제가 치고 간 거예요.

박찬욱 적국에서 잘린 장수를 데려오신 거군요. 거의 <삼국지>인데요. (웃음) 그때는 또 아시아영화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을 때였죠. 그런데 부산영화제가 원래의 성격을 가지고 이룰 만큼 이룬 이 마당에 이제는 경쟁부문을 더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는데요.

김동호 저나 우리 스탭들은 반대하고 있어요. 경쟁제도로 가더라도 역시 새로운 영화들을 월드 프리미어로 부산에 가져오기는 쉽지 않아요. 좋은 월드 프리미어 작품은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에 뺏기기 때문에 그 다음 수준을 부산으로 데려오는 건데, 그건 현실적으로 무리니까요. 당분간은 계속 비경쟁영화제로 가는 게 좋다고 봐요.

“주사가 심한 게스트는 없었나요?”

박찬욱 주변 영화인들이 위원장님께 묻고 싶어 한 질문 중 하나는 그동안 영화제에 참석한 게스트 가운데 가장 꼴불견은 누구였냐는 거였습니다. (웃음)

김동호 그건 실명을 말하기 어렵네요. (웃음) 한국영화계로서는 매우 필요한 분이고, 또 많은 기여를 한 분이 있지요. 그런데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올 때마다 고성을 지르고 스탭이나 자원봉사자와 안 싸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1회 때부터 매년 초청을 하는데, 한때는 영화계 전체에서 부산영화제에 꼭 그분을 초청해야 하느냐는 항의를 받은 적도 있죠. 하지만 한국영화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초청하고 있어요.

박찬욱 주사가 심한 사람은 없나요?

김동호 외국 게스트나 한국 게스트나 그런 사람은 더러 있죠. 한번은 내가 술 끊은 다음에 모 언론사의 주필에게 내가 술을 안 먹는다고 한 시간 동안 육두문자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어요.

박찬욱 그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를 하시나요?

김동호 계속 웃어가면서 농담으로 받아가는 거죠. 간혹 그런 상황에서 중재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공식파티에서 영화인끼리 싸우거나 욕하거나.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간의 싸움도 있었죠. 중재를 하다보면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어요.

박찬욱 위원장님이 말리시면 중재가 안될 수 없겠네요. (웃음) 아까 송강호씨한테 또 물어봤어요. 자기는 역시 부산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본 게 가장 기억에 남는대요. 위원장님이 강호씨에게 그걸 설득한 것도 대단하셨죠.

김동호(웃음) 영화를 찍고 계실 때였죠? 먼저 박 감독에게 전화를 했고, 나중에 송강호씨에게 부탁을 하려 했었죠. 마침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두분이 영화 촬영 중이어서, 끝나고 워커힐호텔 바에서 만났었죠. 또 양주 2, 3병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부탁을 드렸더니, 강호씨가 어쩌지 못하고 수락하더라고요. 사회를 재밌게 잘했어요. 관객도 좋아했고요.

박찬욱 사회를 보는 송강호 개인이라기보다는 사회자를 연기하는 배우 송강호가 아닐까 싶었어요. 위원장님은 언제나 그렇게 강권하지 않으시지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으신 거 같아요. 그런데 이제 약주를 안 하시니까 불편하신 것도 있지 않나요?

김동호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 있어요. 이럴 때 저 친구를 끌고 나가서 술 마시면 풀릴 텐데 하는 거죠. 하지만 내가 또 술을 시작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런 갈등을 느낄 때가 있죠. (웃음) 요즘에는 내가 못 마시니까 다른 사람에게 조금 진한 폭탄주를 만들어서 계속 돌리죠. 나는 같은 양의 녹차를 마셔요. (웃음) 그러면 나도 한 열잔은 마셔요.

“영화제에서 뵐 때면 늘 든든합니다”

박찬욱 술로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김동호 1회 때는 정해진 날짜가 후쿠오카영화제와 겹쳤죠. 개막식과 폐막식 날까지 딱 겹쳤어요. 그런데 우리는 극장사정 때문에 날짜를 옮길 수가 없었어요. 그때 칸영화제의 어떤 관계자가 말하길, 날짜가 같으면 다 후쿠오카로 가지 부산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처지라 몇몇은 초청도 하고, 오찬 때 이야기를 하면서 참석해달라고 독려했어요. 괜찮다고 봤어요. 그쪽으로 갈 사람은 가겠지만, 그쪽에 갔다가 부산으로 올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아니면 부산에 왔다가 후쿠오카로 가거나. 그런데 후쿠오카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사토 다다오씨가 굉장히 화가 났다더라고. 임권택 감독과도 친하고 저도 같이 만난 적이 있어서 친한 관계였으니 난감했죠. 그런데 나중에 하와이영화제의 지넷 폴슨 위원장이 나와 사토 다다오씨를 둘다 초청할 테니 만나서 화해하라고 했어요. 선물도 사가지고 가서 만났죠. 일식집에 데려가서 사과하면서 내년에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영화들을 소개하는 작품전을 할 건데, 사토 다다오씨에게 작품 추천과 발표를 부탁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카드를 하나 들고 가서 저녁을 같이하니까 싹 풀어졌죠. (웃음)

박찬욱 칸영화제 경쟁작이 발표될 때 즈음이면, 한국에서도 점치기를 하잖아요. 위원장님은 그때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나요?

김동호 그렇지는 않아요. 칸의 경우는 영화제 기간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근처 지역의 영화제에 갈 때, 사무실을 찾아가요. 집행위원장을 만나서 한국의 화제작과 동향을 이야기하고, 스틸사진도 가져다 주죠. 그걸 초창기부터 했어요. 한 4, 5년 지난 다음에는 자기들이 저녁을 사요. (웃음) <춘향뎐>이나 <취화선>도 그렇게 추천을 했었죠. 그런 일을 매년 해왔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정보가 나오죠.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도 털어놓게 되니까요. 그런 정도의 정보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박찬욱 영화제에서 뵐 때면, 큰 행사 때마다 항상 계시니까 영화감독들은 든든해요. 언제나 뒤에서 지켜주시는 기분이 들죠. 그때마다 저희 부부와도 만나셨는데, 지금도 아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매일 아침 사모님에게 모닝콜을 해드리는 거요. (웃음)

김동호 아내가 약국을 하니까, 보통 아침 6시에는 일어나야 해요. 그런데 약국 문을 닫고 나오는 시간이 대부분 밤 12시에서 1시가량 되죠. 그런저런 이유로 한국 시간으로 6시가 되면 세계 어디에 있든 전화를 해요. 시차를 맞추는 게 까다롭죠. 현지시간으로 새벽 2시나 3시 정도에 깨워야 할 때가 난감해요. (웃음) 그래도 그게 아내에게 유일하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이에요.

박찬욱 제가 해외에 나갈 일이 있을 때, 집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 타이밍이 있는데 놓칠 때가 있거든요. 그때마다 아내가 꼭 위원장님 이야기를 합니다. (좌중 웃음)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바쁜 와중에도 어렵게 짬을 내서 근처 미술관을 가보면 언제나 위원장님이 먼저 와 계시는 거였어요. 어디를 가든 그 도시의 주요 미술관은 꼭 가서 보시더라고요.

김동호 그때 니스의 마티스미술관에서 뵌 적이 있었죠? 어느 도시든 가면 꼭 미술관을 찾아요. 도록도 꼭 구입해서 가져오고요.

자강불식(自强不息)

박찬욱혹시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시나요?

김동호그런 건 없어요. 서예는 이제 앞으로 발전시켜 나가려고 하죠. 유화도 한번 그려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집에 현대미술 도록은 많아요.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을 거 같아요.

박찬욱서예를 하시니까, 직접 쓰신 글씨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네요.

김동호 부산영화제에서 한국영화 공로상을 줄 때 부채를 일종의 상패로 쓰죠. 그동안 어떤 분을 지정해서 부채에 상 이름과 받는 사람 등을 써왔어요. 그러다가 비용문제로 끊었는데 어느 해인가 갑자기 서예가가 섭외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직접 쓴 적도 있어요. (웃음)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영화제와 자매결연을 맺는 자리였는데, 그쪽에서 뭘 준다는 거예요. 시간은 없는데, 뭔가 우리도 상징적인 교환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합죽선을 하나 사오라고 해서 거기다 글씨를 써서 준 적도 있지요.

박찬욱 즐겨 쓰시는 문장이 있나요?

김동호 어디선가 인용을 할 때는 두보의 시를 많이 참조해요. 사자성어를 쓸 때는 시경이나 역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지요. 주로 쓰는 사자성어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에요. 스스로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뜻이죠.

박찬욱 이제 앞으로 남겨질 부산영화제를 위한 단어 같기도 합니다. (웃음) 부산영화제는 그만두시더라도 한국영화 외교관이랄까, 순회 대사랄까 그런 활동을 하고픈 마음은 있으신가요?

김동호 해외영화제를 다니면서 그런 로비스트는 필요할 것 같다고 느꼈어요. 외국영화제 관계자로서는 영진위 위원장이 만날 때마다 바뀌는 것도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한두 사람이 지속적으로 해외를 다니면서 만나고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해요. 또 필요하다면 나도 도움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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