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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위대한 영화 유산을 남기고 떠나네

82살로 타계한 홍콩 감독, 왕티안린을 추모하며

<암화>(1998) 속 왕티안린.

지난 11월16일 82살로 숨을 거둔 왕티안린은 홍콩 밖에는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홍콩 밖의 평론가들이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영화제들은 무시하고 학술서적에는 기록되지 않은, 커다란 영화사의 한 토막이 사라져가리라. 좀더 젊은 세대에 그는 지난 30년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홍콩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인 왕정의 아버지로 기억될 터이다. 아버지처럼 왕정의 작업 역시 좀처럼 인정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북부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전후 홍콩의 영화산업에 기여한 이한상이나 호금전 같은 감독과 달리, 왕 감독은 상하이 출신으로, 1935년 전쟁 난민이 되어 중국 본토를 떠났다. 그런 면에서 그는 1940년대 후반 또는 5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를 피해 홍콩에 온 감독들과 다르다. 1947년에 이르면 그는 이미 영화 제작의 모든 면을 익혀 영화산업에 참여했으며, 1950년 1월에 첫 감독 데뷔작으로 두편짜리 광둥어영화 <아미비검협>을 만들었다. 이후 3~4년간 그는 20여편의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1980년에 이르러서는 120편에 이르는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그는 TV드라마 제작자이자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지난 10년간 두기봉의 <흑사회>의 노쇠한 갱 두목 역할처럼, 여러 영화에서 명예로운 역할들을 연기하며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1월에 개봉한 나수요 감독의 복고풍 액션범죄드라마 <멸문>에 출현한 게 그의 마지막 스크린 나들이였다.

1980년대 TV에서 코미디작가로 활약하다 영화감독이 된 왕정은 공개적으로 말하길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고 해왔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의 영화를 봤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상황이 어쨌든, 그는 아버지의 영화 장인적인 기질을 이어왔다. 두 사람 다 모든 장르영화를 만들어왔으며 감독이 최고인 오늘날, 왕정은 지배적인 인물이 아니라 제작자가 이끄는 전체 팀의 일원인 감독이라는, 영화 제작의 기본정신을 지켜왔다.

그러나 왕티안린은 홍콩영화가 홍콩과 중국에서 넘어온 재능있는 인재들이 뒤섞인 동아시아의 가장 큰 영화산업이었던 1950년대와 1960년대 홍콩의 제작 라인에서 일한 여러 감독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의 영화는 좋았던가?

그의 초기 광둥어영화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다행히 왕 감독은 훨씬 더 제작 규모가 큰 만다린영화에도 참여했고, 그중 그의 첫 번째 성공작은 1956년에 만든 <도화강의 노래>였다. 다행히 그는 또, 홍콩영화의 전성기인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 MP&GI와 캐세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 중 15편은 캐세이 DVD 컬렉션에 남아 있다. 그 영화들을 보면 왕 감독이 당시 최고 스타들과 함께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세 가지 사랑 이야기>의 임취, <데쓰 트랩>의 교굉, <아빠가 결혼한다>의 우매와 <와일드 와일드 로즈>의 그레이스 창이 그들이다. 이들 영화는 이야기, 연기와 오락이 뛰어나게 배합되어 완벽하게 전문가다우면서 유연한 감독의 역량을 보여준다. 당대의 다른 감독들인 이문과 당황이 만든 영화들처럼, 이 영화들은 오늘날의 작가 감독 중심의 영화 문화 그리고 현재의 홍콩에서조차 종종 잊혀지는 영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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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