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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피해와 분단 그리고 타자

<신화 속의 한국>이란 책에서 말하는 영화에 투영된 한국의 자기표현에 관하여

<웰컴 투 동막골>

한국학 교수이자 번역가(그리고 내 박사논문을 지도해주셨던)인 파트릭 모뤼스는 최근 <신화 속의 한국>이라는,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자서전적 성향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여타 ‘한국학’ 연구서들에 비해 거만함이 확실히 덜한 책이다. <신화 속의 한국>은 많은 학술연구서들과 달리 한국인을 대신해서 한국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 스스로 한국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귀울인다는 점이 특이하다.

모뤼스 교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스스로를 묘사하고 있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북한이 됐든 남한이 됐든 한국은 스스로를 일단 ‘피해자’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피해자란 말인가? 물론 타인의 피해자다.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혹은 반대편에 있는 한국인이든 다들 하나같이 한국에 피해자의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모뤼스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본문 어느 장에 붙인 제목에서도 말해주듯 피해자로서의 한국에는 ‘분단’이라는 흉터가 있다. 한 나라의 자기표현에 관한 저서 <신화 속의 한국>에는 당연히 영화에 관한 대목이 몇 군데 있는데, 거기서 저자는 특히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을 비교하고 있다.

평론가가 아닌 모뤼스 교수는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물론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 작품이 ‘피해’와 ‘타자’라는 전 국가적 담론을 어떻게 전파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화의 작품성과는 무관하게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는 정반대의 사실에서 각각 출발하고 있지만 둘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영화 <쉬리>는 분단이 나쁜 거라고 말한다. 분단은 남의 탓이니까. 하지만 <쉬리>는 분단은 좋은 거라고도 한다. 본질적으로 사악한 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거니까.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이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한다. 똑같은 사람들, 즉 하나의 땅을 분리시키는 거니까. 결국 두 작품 모두 분단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래서 선택된 것이 탐정물 혹은 스파이영화다. 두 영화는 각각의 장르적 특성에 힘입어 이야기를 피바다와 세상의 종말에 가까운 시퀀스로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이를 통해 “영화가 던지고 있는 사회문제를 허구인 영화가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영화가 달리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파트릭 모뤼스는 <웰컴 투 동막골>이 ‘피해’와 ‘분단’, ‘타인’에 대한 생각에 좀더 그럴듯한 해답을 제시해주지만,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가 작품의 배경 때문에 한계에 부닥치는 것 같다고 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웰컴 투 동막골>에서 한국의 통일은 향수가 넘치는 촌스럽게 모조된 마을, 그것도 식상한 시골 이미지로 잔뜩 부풀려놓은 이상향 같은 농촌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니 <웰컴 투 동막골>도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와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분단 이후의 세계를 그려내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모뤼스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웰컴 투 동막골>이, 서로 뿌리가 같다는 걸 (재)발견하는 군인들의 그 말도 안되는 비공개의 장소에서만 끝날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한 뒤, “아마 연극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건 영화 전반에 던져야 할 물음이다”라고 지적한다. 사실 영화예술에서는 공간을 잘라야 할 뿐만 아니라 편집이나 가위질의 법칙과 틀의 원리를 감독들에게 강요한다는 소리다. 관객이 직접 보는 앞에서 등장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엔 연극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모뤼스의 말대로 <웰컴 투 동막골>이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분단을 묘사하는 데 좀더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면 어쩌면 이 영화가 연극을 각색한 작품인 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연극에서도 막은 내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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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