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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키스보다 달콤한 씨네필의 유혹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선택한 영화는?

2011년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다. 1월18일(화)부터 2월27일(일)까지다. 국내의 유명 영화감독 13인과 평론가 2인 그리고 음악인 2인이 뽑은 영화들이 상영된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한국영상자료원은 우정의 이름으로 각자가 보유한 영화들을 보내왔다. 지난해 타계한 에릭 로메르 추모전과 미지의 감독 마테오 가로네 특별전도 함께 열린다. 한겨울을 녹일 만큼 풍성하다. 그중 오랜만에 상영하거나 새롭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들 위주로 소개한다. 매년 초 우리를 찾아오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올해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기대된다. 지금부터 감상해보자.

개막작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Quatre aventures de Reinette et Mirabelle

에릭 로메르 │ 1987년 │ 95분 │ 프랑스 │ 컬러 │ 35mm │ 12세 관람가

시골 소녀와 도시 소녀가 우연히 길 위에서 만난다. 흑발의 시골 소녀의 이름은 미라벨, 금발의 도시 소녀의 이름은 레네트. 미라벨은 감성이 풍부한 반면 매사에 원칙적이고 레네트는 평상시엔 냉철한데 문득 일반의 상식을 거스르는 모험심을 발휘한다. 영화는 총 4장으로, 그러니까 네개의 모험으로 이뤄지는데 레네트가 미라벨의 시골집에서 보내는 며칠간이 첫 번째 장, 그런 다음 미라벨이 파리에 있는 레네트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동거를 시작하면서 나머지 세개의 장이 파리에서 일어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 네개의 장이 있다는 건 선뜻 대답을 내놓기 어려운, 적어도 네개의 질문과 네개의 모순이 함께 들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동화 같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도덕극 같기도 한 일화들이 빚어내는 로메르식의 철학들이 보석같이 빛난다. <녹색광선>을 만든 직후 로메르가 그 기운과 영화적 방식을 16mm 카메라에 담아 즉흥적으로 만든 작품이며 “신중하게 경쾌하고 수수한, 정말이지 이야기들 안에 귀결이란 일어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형식의 최고봉에 위치한 영화감독을 보여준다”(조너선 로젠봄)는 평을 받은 바 있다. 2011년 올해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

김영진 추천작 <산 파블로> The Sand Pebbles

로버트 와이즈 │ 1966년 │ 185분 │ 미국 │ 컬러 │ 35mm │ 15세 관람가

1926년 중국에 파견된 전함 산 파블로호에 홀맨이라는 새로운 기관사가 온다. 처음에 홀맨은 동료들이 마치 노예를 부리듯 중국인들을 부리는 것에도, 그 때문에 전문가도 아닌 중국인들이 전함의 실제 일꾼처럼 일하는 것에도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몇몇 사건과 인물들을 만나며 점차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그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중국인 친구가 생기는 등 대륙에서의 흥미진진한 새로운 경험이 펼쳐진다. 하지만 외세를 밀어내고자 하는 중국 내의 분위기가 거세지자 홀맨과 산 파블로호의 선원들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리처드 매켄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며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상처뿐인 영광> 등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숨겨진 수작이다.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개인들의 애절함이 교차하는 대서사극으로서의 매력이 가득하다. 3시간이라는 다소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굽이도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매력적인 분위기의 장면도 많다. 그중에서도 주연배우 스티브 매퀸의 연기와 비정의 정조가 돋보이는, 마치 중국식 전통 건물에서 펼쳐지는 서부극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라스트신이 특히 일품이다.

오승욱 추천작 <북극의 제왕> Emperor of the North Pole

로버트 알드리치 │ 1973년 │ 118분 │ 미국 │ 컬러 │ 35mm │ 청소년 관람불가

대공황기의 미국. 열차를 무임승차하려는 부랑자들에겐, 악명 높은 차장 샤크(어네스트 보그나인)가 있다. 그는 자신의 열차에 몰래 올라탄 사람들을 쇠망치로 때려죽인다. 마침내 ‘A No. 1’ 혹은 북극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무임승차의 제왕(리 마빈)이 샤크의 열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겠다며 일종의 그들만의 결투를 신청하고, 샤크는 그걸 막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사람들은 그들 중 한쪽에 돈을 걸고 이 경주의 결과를 기다린다. 그리고 우린 그 경주를 영화 내내 본다. <북극의 제왕>은 1970년대 어떤 미국영화들이 지닌 대결과 승계에 얽힌 기이한 고독감과 연대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서도 장르적 단순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로버트 알드리치식 영화로서도 손색이 없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지만 두 주인공의 대결을 특별하게 그리고 싶었던 로버트 알드리치는 훗날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다. “두 주인공의 경쟁이 맞붙었을 때 거기엔 서로에 대한 존경이라는 골자가 있다. 그들은 그 경기장(열차) 바깥에서는 어떤 충돌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열차 바깥에서) 서로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왜 그러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다.” 둘 중 한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극단의 대결 자체가 진짜 주인공이 되는 영화들이 있는데 <북극의 제왕>은 그중 고전이다.

류승완 추천작 <미친 개들> Kidnapped

마리오 바바 │ 1974년 │ 96분 │ 이탈리아 │ 컬러 │ 35mm │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시작되면 촌스러운 붉은 화면 안에 여자의 실루엣이 보이고 더없이 소름끼치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온다. 그 형체와 울음소리는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다지 정교한 장치 한 군데 없이도 무한정으로 신경을 거스를 줄 아는 장면. 이 장면이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 마리오 바바의 영화임을 입증한다. 인간의 무의식으로 누구보다 한참이나 내려갔다는 평가를 받은 혹은 충격을 줄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이라도 선호했다는 감독 마리오 바바. 가차없이 괴팍하고 소름끼치는데 동시에 허술하고 장난기까지 가득한 그의 영화들은 대개 공포영화였다. 하지만 <미친 개들>이 공포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공포의 효과를 가져오는 백주의 탈주극이다. 몇몇 범죄자들이 은행을 털다 일이 잘못되자 두 여자를 인질로 잡는다. 그중 한 여자를 초반에 살해하더니 나머지 한 여자를 끌고 간다. 심지어 아이를 실은 남자의 차에 올라타더니 그를 위협하여 함께 데리고 간다. 촬영은 거의 비좁은 차 안에서만 이뤄져 폐소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고 인물들은 대부분 끔찍하다. 급기야 마지막에 이르면 막가파 수준의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것조차도 마리오 바바식의 장난기에 속할 것이다. 감독이 남긴 노트를 기본으로 새롭게 편집한 복원판을 상영한다.

정성일 추천작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L'arbre, le maire et la m?diath?que

에릭 로메르 │ 1993년 │ 105분 │ 프랑스 │ 컬러 │ 35mm │ 12세 관람가

에릭 로메르는 ‘계절 이야기’ 연작을 만들던 중간에 그의 가장 예외적인, 그러나 가장 정치적인 작품인 <나무, 시장, 그리고 메디아테크>를 만들었다. 그는 언젠가 말했다. “<나무, 시장, 그리고 메디아테크>처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영화들을 만들었을 때에도 관객은 따라와줬다. 나는 나 자신을 심리학적 토픽이나 로맨틱코미디에 한정짓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게 가장 개인적으로 연루된 것이라 느낄지라도 말이다.” 이 영화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의 시장이 최첨단 미디어단지를 만들고자 하는 건 극적 사건이 아니라 ‘토론의 영화’가 되기 위한 전제다. 로메르는 “만약 누가 무엇을 했다면,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의 챕터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배우와 배우가 또는 배우와 일반인이 짝을 짓고 마치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처럼 천연덕스럽게 의견을 교환하는 픽션과 다큐의 결합을 완성해낸다. 로메르의 모든 영화적 요소가 그대로 있는데 거기 가상의 정치적 사건이 전제됐을 때 이 영화는 마침내 ‘자연, 정치, 그리고 유토피아’에 관한 로메르의 토론이다. 코뮌에 관한 이처럼 아름다운 상상적 이야기도 드물다.

봉준호 추천작 <붉은 살의> 赤い殺意

이마무라 쇼헤이 │ 1964년 │ 150분 │ 일본 │ 흑백 │ 35mm │ 청소년 관람불가

종으로 들어왔으나 주인 아들의 겁탈로 아이까지 낳고 내처 그의 아내로 살게 된 사다코. 남편은 출장을 가고 아이도 시어머니와 함께 집을 비운 사이에 강도가 든다. 강도는 돈만 훔쳐가지 않고 사다코를 겁탈한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당한 그런 일이 사다코는 치욕스러워 “죽어야 해! 죽어야 해!”라고 다짐하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부엌에 나가 밥을 찾아 먹는다. 이제부터가 심상치 않다. 강도는 그녀를 또 찾아오고 그녀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지만 막상 그렇지 않다. 서서히 이 괴이한 상황의 주도권은 사다코쪽으로 이동한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영화가 서양에 심어준 전통의 여성상에 대해 야유한다. “나루세의 <부운>과 미조구치의 <오하루의 일생>의 여주인공들 같은 자기희생의 여인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여주인공들이 삶에 진실하다. 당신 주변의 일본 여인을 둘러보라.” 결코 미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다코의 얼굴과 풍채, 그녀가 인간의 욕망과 육체에 관해 역겨울 정도로 솔직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주인공이 되자 <붉은 살의>는 무서운 생존의지의 영화로 바뀐다. 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는 간단명료하게 찬미했다. “깊고 더럽고 찬란한 영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 <롤라 몽떼스> Lola Montes

막스 오퓔스 │ 1955년 │ 116분 │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 컬러 │ 35mm │ 15세 관람가

그녀는 ‘기억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고작해야 서커스의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구경거리가 됐지만 한때 그녀가 지녔던 고귀하고 위엄있는 백작 부인으로서의 자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어떤 남자도 매혹시킬 수 있었던 그녀는 지금은 이야기로 관중을 홀린다. 세계의 변화와 함께 몰락해간 그녀가 서커스 무대의 한가운데에 등장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전개해갈 때 영화는 기이한 시간의 경험을 선사한다. 발표 당시에는 논란에 휩싸일 만큼 어마어마한 흥행 실패작이었으나 시간이 지나서는 “오퓔스적인 것의 창조적 통합체로서도, 자체의 완결성을 지닌 스펙터클로서도 즐길 수 있는 작품”(앤드루 새리스)이라는 평까지 얻어냈다. 막스 오퓔스 영화의 창조적 아름다움이 전부 집약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메라의 움직임, 교차하는 기억들, 정주하지 않는 인물들, 그중에서도 설명되지 않는 여인의 존재. 이 모든 것이 컬러로 작업한 막스 오퓔스의 첫 번째 작품이자 유작인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이번 상영작은 2008년 오리지널 테크니컬러로 복원된 판본을 상영한다. <롤라 몽떼스>는 진짜 스펙터클을 보는 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 <보봐리 부인> Madame Bovary

장 르누아르 │ 1933년 │ 101분 │ 프랑스 │ 흑백 │ 35mm │ 15세 관람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엠마는 의사 샤를르 보봐리와 결혼하지만 권태를 이기지 못해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고 동시에 돈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다 결국 파국을 맞는다. 훗날 이자벨 위페르를 마담 보봐리로 택했던 클로드 샤브롤은 섬뜩한 미치광이로 그녀를 그려냈다. 반면 장 르누아르는 그와는 다르게 훨씬 풍요로운 인물로 보봐리 부인을 상상했던 것 같다. 르누아르가 처음 내놓은 건 3시간이 훌쩍 넘는 버전이었지만 제작자의 삭제로 지금은 101분짜리 상영 버전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장 르누아르 영화의 생명력과 활기까지 삭제당한 것 같진 않다. 앙드레 바쟁은 보봐리 부인 역의 발랑틴 테시에를 “깜짝 놀랄 만한, 상식에 어긋나는 캐스팅”이라며 이것을 배우를 중요시한 르누아르의 “긍정적 도발”로 보았다(한편 샤를르 보봐리는 르누아르의 친형제인 피에르 르누아르가 연기했다). 에릭 로메르는 “르누아르는 원작의 대사와 장면들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충실한 재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플로베르의 황금 같은 문체에 주눅들지 않았다”며 원작과 비등한 힘을 겨룬 이 영화에 대해 지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지녔다> Santa Claus Has Blue Eyes

장 외스타슈 │ 1966년 │ 47분 │ 프랑스 │ 흑백 │ 35mm │ 15세 관람가

매일 친구들의 담배나 얻어 피우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는 청년 다니엘은 어느 날 문득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서게 되고 산타 복장을 하고 사진 모델을 하며 푼돈을 번다. 그 뒤로 영화에는 사소한 일들 몇 가지가 더 이어지는데 이상한 건 시종일관 감도는 긴장이다. 급기야 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밤거리를 헤치며 이제 창녀촌으로 가자며 다들 얼간이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어딘가 처연하기까지 하다. 20대의 청년 장 외스타슈는 그의 두 번째 영화에서 자신의 주변에 널린 앙상한 풍경을 찍어낸다. 주인공으로 장 피에르 레오는 더없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장 외스타슈는 “나는 리얼리즘의 외관이 아니라 시네마의 리얼리티에 도달하기 위해 인위적 방식으로 인물들을 말하게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재배열된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떤 비평가들은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0)가 ‘68년 5월 이후에 길을 잃어버린 청년들’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마치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지녔다>는 그 시간이 아직 오기 전,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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