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생각도감
죽이는 TV <스테이튠>(stay tuned)
2002-01-02

민동현의 오! 컬트

“Happy New Year!!!! 2002.”

어느새 새해가 밝아버렸다. 밀레니엄버그니 뭐니 두려움과 함께 맞이했던 새 천년도 어느새 두해를 넘어선 것이다. 항상 새로운 해가 밝아오면 문방구에 가서는 큼직한 연중 계획표를 사서 방 안 벽에 딱 붙이고 거창한 목표와 계획들을 세워놓곤 했던 게 기억난다. 뭐 그 수많았던 계획들이 이루어진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계획을 세우는 순간만큼은 상당히 내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기에 그 계획의 성취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올해도 여지없이 나의 머릿속엔 무수한 계획과 희망들이 꿈틀댄다.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미술도 다시 시작하고 싶고, 참 이전부터 관심있었던 판화도 올해는 꼭 배워야겠고, 아차차! 집 앞 수영장도 등록해야 하고, 영어학원 등록도 잊었었네…. 이렇게 한참을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갑작스레 누군가 나의 맘의 문을 두드린다. 검은색 옷차림의 불길한 느낌의 사나이. 그는 내게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무수한 나의 이전 꿈과 희망의 계획들을 건네주곤 괴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차를 내달려서 땅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곤 내 맘 가득 차오르는 두려움과 허탈감.

그러나 뭐 지나간 것을 어쩌랴? 뭐 이루지 못한 게 많기에 그만큼 더 큰 희망과 계획들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려∼ 나 지난 한해 좀 못살았네∼ 하고 말면 그만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리 못산 것도 아니다. 10가지 계획 중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마 그 사람은 자기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계획들을 이루어냈던 것일 게다. 나 또한 올해 계획하고 의도했던 일들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뿌듯하게 살아왔다. ‘오! 부라더스’라는 멋진 이들과 함께 뮤직비디오란 것도 만들어봤고, 이렇게 못난 능력에 글도 쓰고 있느니 말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지난 나의 ‘오! 컬트’들을 읽어보니 내 모자란 글실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누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나름대로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세상과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 풀어낸 듯하여 기쁘고 뿌듯했다.

<스테이튠>

2002년 새로운 해에는 좀더 새롭고 재미난 영화들을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라면서 어렵사리 고민 끝에 한 영화를 골랐다. 저예산 영화는 잘 만들다가 어느 순간부터 <엔드 오브 데이즈>니 <머스킷티어> 같은 블록버스터로 초를 치고 있는 피터 하이암스의 92년 영화인 이 작품은 TV에 대한 유쾌한 조롱으로 가득한 영화다.

지옥에 있는 사탄이 시청하는 유일한 방송 <헬TV>. 666개의 채널을 보유한 이 전대미문의 방송채널은 하루종일 TV에 빠져 사는 이에게 찾아가서는 거대한 접시 안테나와 대형 TV세트를 선물로 준다. 그러나 대개 영화에서 사탄들이 하는 일이 매한가지듯 이번에도 사람들은 TV 속으로 빨려들어가서는 24시간을 버텨내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도 새해를 맞이하는 각오에 찬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항상 자신의 일에 만족 못하며 TV에만 빠져 살던 로이나 자신의 성공으로 남편이 의기소침해 있는 줄 알고 힘들어하던 헬렌도 엉뚱스레 TV에 빠져서는 만화 속 생쥐까지 되어 각종 기괴한 프로그램들에서 간신히 살아남고 결국 새로운 출발을 하니 말이다.

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해석 같긴 하지만 지난 한해 TV와 잠에 빠져 살던 과거가 있어서인지 결코 남 이야기 같지 않았던 영화였다. 각종 영화나 TV 프로그램들을 사탄 취향에 맞게 차용한 장면들을 비롯해서 이 영화 곳곳에 숨겨진 귀여운 상상들을 따라가다보면 나름대로 내 지난 생활 속에서 영화 속 부서지는 TV 리모콘마냥 없애버려야 할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혹, 나만 그렇게 보는 건지도 모르지만…. 암튼 새해 복 많이 받자! 듬뿍듬뿍.

민동현 I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