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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명상에서 빚어진 ‘셀’의 환희
김도훈 2011-06-23

10년 만에 완성된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소중한 날의 꿈>

<소중한 날의 꿈>은 개봉 대기 리스트에 전설처럼 올라 있는 수많은 작품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소중한 날의 꿈>은 기획으로부터 거의 10년 만에 드디어 완성되어 6월23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주무른 결과물이니 지금 개봉하면 좀 올드해 보이지 않겠냐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소중한 날의 꿈>은 지난 10년의 세월을 온전히 견뎌낸 아름다운 셀애니메이션이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소중한 날의 꿈>은 70년대 말에서 1981년 사이의 어느 순간을 무대로 한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러브 스토리>의 라이언 오닐을 꿈꾸던 시절. 작은 도시의 떡집 딸 이랑(목소리 출연 박신혜)은 계주에서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추월당하자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넘어져버린다. 이랑은 수많은 미련을 떠안고 육상부를 탈퇴하지만 달리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게 없고 별다른 꿈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련된 서울 여학생 수민(오연서)이 전학을 온다. 이랑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둡고 조금 조숙한 수민과 절친한 친구가 된다. 동시에 소녀의 가슴에는 첫사랑이 찾아온다. 그녀는 손수 만든 거대한 연으로 비행실험을 하다가 추락한 철수(송창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고장난 라디오 수리를 맡기러 읍내의 전파사에 갔다가 주인인 삼촌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수를 만난다. 이랑은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철수를 보며 설렌다. 그러나 이랑은 자신이 없다. 계속해서 실패하면서도 또렷한 미래를 꿈꾸는 철수를 보면 자신의 미래가 한심해 보이고, 조숙하고 똑똑한 수민에게서는 일종의 열등감을 느낀다. 그렇게 오래전의 청춘은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70년대 말에서 1981년 사이

<소중한 날의 꿈>은 안재훈 감독의 지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다. 그는 고교 시절 가수 김동환이 부른 <소중한 날들의 기억>이라는 노래를 듣는 순간부터 <소중한 날의 꿈>을 꿈꿨다. “‘아무런 미움없이 살고 싶어,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이런 가사였다. 그걸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른이 되어 어린 날의 한계점을 말해줌으로써 오히려 더 꿈을 크게 만들어주는 노래라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때는 시골에 살던 터라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쨌든 김동환의 노래 같은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나중에 해보고 싶었다.” 이후 안재훈 감독은 지금의 부인 한혜진 감독(두 사람은 <소중한 날의 꿈>을 공동으로 감독했다)을 만나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를 만들었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단편 <히치콕의 하루>(1998) 이후에도 많은 단편 작업을 했다. 안재훈 감독이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소중한 날의 꿈>이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건 지난 2004년의 일이다.

안재훈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대신 <인어공주> <아내가 결혼했다>의 송혜진 작가를 끌어들였다. 송혜진 작가가 시작부터 안재훈 감독의 비전에 온전히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송 작가의 단편 <안다고 말하지 마라>(2003)를 보자마자 바로 이 사람이 내 영화를 채워줄 사람이라고 깨달았다. 그런데 송 작가는 우리가 만든 이야기를 보더니 이런 이야기면 쓰지 않겠다고 했다. (웃음) 나는 교훈적이지 않으면서 건강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자신이 직접 쳐다보는 내 이야기라면 더 건강하지 않을까 싶었고, 또 애니메이션 같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송 작가가 보기엔 내가 부정하려고 했던 게 모두 들어 있는 이야기였나보더라. 왜, ‘난 이런 게 싫어’라는 말 속에는 사실 ‘난 이런 사람이야’라는 의미가 있잖나. 어디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나 고민했고, 내 일기장들을 생각했다. 그걸 송 작가와 발췌하다보니 너무나도 생동감있는 내가 들어 있더라. 송 작가가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해서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시대의 흔적과 기억의 공유

<소중한 날의 꿈>은 추억을 이야기하는 애니메이션들이 그렇듯이 복고적인 향취로부터 영화적 즐거움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70년대와 80년대 초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가 응당 자신의 이야기라며 무릎을 칠 만한 시대적 디테일이 가득하다. 주인공들의 의상, 그들의 방에 놓여 있는 소품은 물론, 레코드 가게에 꽂혀 있는 음반 커버의 디테일까지, 제작진은 실사영화를 만드는 기분으로 주의를 기울여 시대를 복원하고 고증해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감상적인 회고담으로 빠지지 않은 이유는 안재훈 감독이 영화 속의 시대 고증을 하나의 배경이 아니라 영화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덕이다. 이를테면 <소중한 날의 꿈>은 주인공 이랑이 빠져든 영화 <러브 스토리>의 몇몇 시퀀스를 그대로 재연해서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약간 과장된 화풍과 TV 재연배우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성우에 의해 변환된 이 시퀀스는 회고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코미디를 위한 장치로 쓰이고, 효과도 상당하다.

물론 <소중한 날의 꿈>으로부터 2000년대 초반 충무로가 토해냈던 수많은 복고 취향의 영화들, 혹은 올해 개봉한 두편의 복고 영화 <써니>와 <굿바이 보이>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써니>가 80년대의 팝문화를 영화적 재미로 끌어들이고, <굿바이 보이>가 폭력적인 시대상을 읽어내기 위해 80년대로 돌아갔다면, <소중한 날의 꿈>은 지금 세대에 완전히 사라져버린 기억을 환원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 안재훈 감독이 영화 속 시대를 ‘70년대 말부터 81년 이전까지’라고 한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81년 이전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컬러TV가 처음으로 나온 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흑백으로 기억했던 과거의 풍경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어떤 판타지 같았다. 기억의 단절이랄까. 외국은 어른의 기억이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이어지면서 아이들의 시대까지 중첩되어 내려온다. 하지만 한국은 지나치게 변화가 빨라서인지 세대를 잇는 기억의 공유가 없다. 그래서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당시 흑백 풍경을 디테일하게 컬러로 표현하면서 그 시대의 흔적과 기억을 공유해보고 싶었다.” 시대의 흔적과 기억의 공유라는 말은 <소중한 날의 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동시에 여기에는 시대에 안주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개별적 에피소드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이야기는 이랑(그리고 수민, 철수)의 내적인 성장에 집중한다. 스스로 포기해버린 꿈을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다시 찾아가는 이랑의 이야기는 다만 70~80년대의 세대를 위안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소중한 날의 꿈>에 전체적인 줄거리를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송혜진 작가의 충무로 실사영화 시나리오들, 특히 <소중한 날의 꿈>처럼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은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의 잔재미를 살리면서도 거대한 극적 야심 또한 놓지 않았다. 안재훈 감독 역시 하나의 분명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걱정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PD들은 그때도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의 자본을 끌어와야 하는 영화이고, 또 7여년의 제작기간을 버틸 만한 이야기는 분명히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어떤 대단한 사건을 만들어 넣어도 제작기간 중 실사영화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사건보다는 감성을 담자고 선택했다. 대신 PD들은 그래도 누구를 죽이거나 해야 하지 않겠냐고…. (웃음)” 대신 <소중한 날의 꿈>은 어떤 애니메이션적인 환상으로 이야기의 뼈대를 보완한다. 특히 우주비행을 꿈꾸는 철수와 삼촌의 존재(심지어 안재훈 감독은 둘이 운영하는 전파사에 1981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감시카메라를 살짝 놔두기까지 한다), 남해의 공룡 발자국을 찾아가는 여행. 이 두 가지 판타지적 요소는 <소중한 날의 꿈>이 리얼리즘에 기반한 이야기를 건네면서도 애니메이션만의 은유법을 절묘하게 버무려넣었음을 보여준다.

한국형 얼굴과 움직임을 찾아서

<소중한 날의 꿈>이 애니메이션으로서 훌륭한 또 하나의 지점은, 자신만의 화풍과 화법을 찾으려는 고군분투 속에서 영화적 감정의 결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건 움직임과 캐릭터의 얼굴이다. 한국인의 얼굴을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만들어진 많은 장편애니메이션들은 한국적인 캐릭터를 온전히 살려내는 데 완벽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소중한 날의 꿈>은 정말로 그 시대에 살아 있었던 세대의 얼굴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안재훈 감독 역시 그게 정말로 중요한 열쇠였다고 말한다. “애니메이션하는 사람들은 디즈니, 지브리를 보고 그리며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나 역시 스승이 없어서 원화를 했던 <배트맨>을 따라 그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스탭들에게 옛날 부모님 앨범을 갖다놓고 그리라고 했다. 상상으로 얼굴을 그리지 말고, 당신들 부모님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옛날 앨범의 사진을 오려낸 다음, 이 사람은 여기에, 저 사람은 저기에, 하나씩 지정해서 그려보라 했다.”

안재훈 감독은 단순히 캐릭터의 얼굴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적인 동작에서도 한국적인 뉘앙스를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확실히 <소중한 날의 꿈>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리미티드 애니메이션과 디즈니의 풀애니메이션 중간 어디쯤에서 적절한 속도를 찾아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안재훈 감독은 “<소중한 날의 꿈>에서 애니메이터로서 가장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한국인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정형화된 어떤 동작 같은 게 있지 않나.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들은 나름대로 ‘통! 통! 통! 통!’ 하고 뛰어가는 리듬이 있다. 나는 제한된 일본의 리미티드와 계속해서 움직이는 미국의 풀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소중한 날의 꿈>이 찾아낸 고유의 애니메이션 미학은 ‘연필로 명상하기’의 다음 작품에서 더욱 진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게 틀림없다.

<소중한 날의 꿈>은 잊혀진 과거의 기억을 소박하고도 세밀한 셀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 속에서 재발견하는 동시에 21세기 청춘의 마음을 위로하는 영화다. 그때도 지금도 청춘은 비틀비틀 꿈을 찾으며 자란다. 그건 우주를 비행하려는 꿈이기도 하고, 서른세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뒤틀린 꿈이기도 하고, 확연한 꿈을 가진 다른 청춘들에게 배우면서 되찾는 꿈이기도 하다. <소중한 날의 꿈>은 셀의 아름다움 속에서 청춘을 노래하는 시인의 노래다. 그리고 우리는 연필의 명상으로부터 한국 애니메이션의 어떤 스탠더드를 재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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