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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그 영화적 태도가 믿음직스럽네

<모비딕>, 불신과 냉소의 시대에 믿음을 이야기하기

음모론은 불신의 결과물이다. 세계는 일종의 꼭두각시놀이가 펼쳐지는 무대이고, 그 위의 모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된 결과라는 것, 달리 말해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인’을 상상하는 것이 음모론의 일반적 성향이다.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시대, 공공의 사회가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그렇게 믿음이 사라진 공백의 자리를 음모론으로 채우려 한다. 이러한 면에서 ‘정부 위의 정부’라는 거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모비딕>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영화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도록 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정부와 함께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모비딕>이 배경으로 하는 1994년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두 시대의 유사성은 이미 박인제 감독도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시대가 과연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에 대한 믿음의 문제에서 두 시대의 궁극적 차이가 있다고 본다. 윤혁(진구)이 기자회견을 열어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만약 현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동일한 영화적 감흥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1994년이라는 20년이 조금 못 미치는 시간적 배경이 <모비딕>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느낀 것은 영화 말미의 이 순간이었다.

<모비딕>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기능하는 인물을 단조롭고 불충분하게 묘사한 탓에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서 구체적인 질감을 느낄 수 없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의 대략적 윤곽선만 그릴 뿐 그 속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지 않았거나 그에 실패한 작품에 가깝다는 것이다. 때문에 관객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관한 구체적 정보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전부다. <모비딕>의 이러한 성격은 보다 자극적인 음모론적 상상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우며 홍보한 이상, 용두사미격으로 끝나버린 ‘보이지 않는 손’의 묘사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놓치기 쉬운 것은 <모비딕>의 방점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고래의 일부분밖에 만지지 못하는 이방우(황정민)의 꿈처럼 영화 속 인물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싸우는 배후 세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인물들이 보고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진실을 향한 노곤한 여정

<모비딕>의 관심은 그 세력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과정의 노곤함이다. 1990년대라는 아날로그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역시 한발 한발 더디게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비딕>이 <대통령의 음모>나 <조디악>의 연장선상에 존재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 작품은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물들의 묘사에 공을 들일 뿐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방우와 윤혁 등의 중심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싸우는 인물들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서, 진실과 양심으로부터 스스로 무능해지는 비참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주어진 환경과 싸우는 자들이다. 이 과정에서 <모비딕>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대체로 팀을 이룬 구성원 중 하나, 또는 그 팀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데스크가 배신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지만 <모비딕>은 ‘우리’로 묶일 수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어떠한 배신도 끼어들지 않도록 한다. <모비딕>이 시대착오적인 순진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지 과거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신과 냉소의 시대의 산물인 음모론의 서사를 통해 그러한 출생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믿음’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 장면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모비딕>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왜 1990년대를 배경으로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익히 알려졌듯이, <모비딕>은 1990년에 있었던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 고백을 소재로 한다. 이 사건을 1994년으로 시간적 변형을 가미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그 사건의 기본적 팩트를 유지한 채 현시대로 옮겨와도 충분히 유사한 이야기로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박인제는 김일성의 사망과 성수대교의 붕괴, 살인적인 폭염으로 기록된 1994년을 하나의 캐릭터처럼 다루려 했다고 했지만(<씨네21> 808호), 그의 바람처럼 그해의 다사다난함이 영화에 잘 살아 있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1994년이라는 과거에 머무르고자 한다.

진실의 호소가 가능했던 시대

엉뚱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모비딕>에서 윤혁의 기자회견 장면을 보면서 자살로서 자신의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일련의 사건이 떠올랐다(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도 이러한 자살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다). 물론 1994년 이전에도 진실을 호소하며 분신했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과거 이들의 죽음이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의 결과였다면 최근의 현상은 그에 대한 좌절감처럼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다. 내가 말하는 싶은 것은 진실이 그것을 가로막는 장벽을 뚫고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시대, 즉 불신과 냉소의 시대에서 사라진 것은 진실이 갖는 파괴적 힘과 더불어 그 진실이 전달될 수 있을리라는 믿음이다. 자살의 몸짓이 진실을 향한 언어를 대신해버린 시대, 자살이라는 절실한 호소(상징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미궁을 맴도는 시대, 진실의 담지자로서 언어의 한계가 공인된 지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모비딕>은 진실이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을 넘어설 수 있으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한국사회는 <모비딕>보다는 <부당거래>쪽에 더 가까이 있다. <부당거래>의 시대에 억압되는 것은 사회(공동체)에 대한 믿음이고 그 속에서 진실의 역할은 무의미해진다. 만약 <모비딕>이 현재를 배경으로 했다면 그에 어울리는 엔딩은 편집부장(김보연)이 이방우를 위로하며, (<차이나타운>의 마지막 대사를 패러디해서) “잊어버려, 이방우. 여기는 코리아타운이잖아”라고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실패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윤혁의 기자회견 장면은 현재가 아닌 1990년대의 시대성 속에서 영화적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다(어쩌면 1994년은 그 마지막 시점인지도 모른다). 이는 <모비딕>이 되살려내려는 것이 단지 진실을 향한 노곤한 여정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던 시대(사회)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모비딕>은 억압된 과거의 리얼리티(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영화의 내용)를 되살려내 현재의 리얼리티(냉소와 불신의 시대의 음모론이라는 영화의 형식)와 대결시키려 한다. 물론 <모비딕>이 되살려낸 과거의 흔적이 현재를 반추하는 계기로 얼마나 작동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 시절을 함께 호흡할 만큼의 시대적 공기가 영화 속에 충분히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모비딕’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을 ‘시대의 얼굴’이 삭제된 영화적 인물로 추상화한 것은 무엇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 해도 <모비딕>이 음모론이라는 서사 방식을 통해 자신을 생산한 불신과 냉소의 시대와 맞서려 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단점을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순진하고 투박한 믿음에 불과하다 해도, <부당거래>의 시대에 굴복하려 하지 않으려는 박인제의 영화적 태도는 무엇보다 믿음직스럽다. 이방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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