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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나, 오늘 정말 괜찮았나…

SBS <여인의 향기>의 연재 때문에 목이 메인다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

3년 전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과 동기의 부고 메일을 받았다. 입학과 함께 전공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망쳐 집과 동아리방만 오가다 졸업한 나에게 과 동기란 수년에 한번 누군가의 결혼식장에서나 마주치는 먼 친척보다도 더 낯선 존재였지만 그 소식을 받아들던 순간의 스산함과 막막함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고가 아니라 병이었고, 진행이 빠른 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가끔 생각했다. 스물일곱, 기껏해야 스물여덟의 나이로 자신이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죽음이란 그저 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사랑하는, 혹은 미워하는 사람들조차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관념이 아닌 몸으로 느꼈을 때 그녀는 무엇을 했을까. 아무리 기억해내려 애써도 그녀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나는 물론 알 수 없었다.

잘나가는 노처녀, 못 나가는 노처녀, 신데렐라 노처녀, 캔디 노처녀 등 온갖 종류의 노처녀들이 차례차례 드라마를 휩쓰는 사이 저도 모르게 감수성 메마른 노처녀 대열에 끼어들고 말았음에도 그 ‘동족’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내가 SBS <여인의 향기>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서른넷, 나보다 나이는 조금 더 먹었지만 이 정도면 슬슬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고 말해도 무방할 여행사 직원 이연재(김선아)는 팍팍하고 구질구질한 직장생활에 그로기 상태까지 내몰린 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병명은 담낭암, 건강이 나빠져 살 빠지는 것도 모르고 “이제 연애하려나봐”라며 기뻐하던 그는 ‘죽어가는 노처녀’라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게 박복한 팔자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

물론 지난 33년간 없었던 남자 복이 치사하게도 인생 6개월 달랑 남은 타이밍에 터지면서 세상 다 산 듯 무심하고 심드렁한 게 매력인 강지욱(이동욱)과 쌀쌀맞은 얼굴 뒤에 정반대의 마음을 감춘 채은석(엄기준)이 연재의 주위를 맴돌지만 어차피 로맨스는 어떻게든 될 일이다. 그보다 연재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 버킷 리스트를 꼽으며 첫 번째로 ‘하루에 한번씩 엄마를 웃게 만들기’라 적어 넣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목이 꽉 멘다. 죽음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남겨지는 입장일 거라 착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떠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제일 먼저 시작할 것인가.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하다가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진짜 내일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현재를 팔아서 살 만큼 가치있는 미래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지난해 SBS <닥터챔프>에서 꿈을 가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기에는 이미 현실에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을 성실하게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던 박형기 감독과 노지설 작가는 로맨스의 향기가 더욱 짙어진 <여인의 향기>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묵묵하게 성장해가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달리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는 잘 살고 있는가,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제작진의 말은 문득문득 일상의 어느 순간을 정지시킨 것처럼 찾아와 마음을 두드린다. 연재가 항암치료를 받고, 좋아하는 가수의 팬 미팅에 가고, 소원대로 탱고를 배우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내일이 다시 오지 않더라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오늘이 괜찮았나. 6개월어치의 용기를 36개월 할부로 내서라도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만드는 물음들이 그렇게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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