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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팝콘 같은 사랑을 원한 게 아닌데

영상미에 스토리가 희생된 <푸른 소금>

어떠한 작가도 완전한 무에서 작품을 창조해내지는 못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텍스트는 분명히 이전에 존재한 어떤 텍스트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러니 기시감을 느낀단 것이 영화 감상에 해가 되는 조건은 아닐 것이다. 영화 <푸른 소금>을 보는 동안 스쳐 지난 무수한 편린들 그리고 결국 남은 것들, 지금 나는 그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가 있고, 이들은 부녀지간으로 보일 정도의 나이 차가 난다. 그렇지만 둘은 등장하자마자 연인의 뉘앙스로 서로에게 다가가기에, 그들의 관계는 어색할 틈조차 없이 남녀 사이가 된다. 이어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여자가 남자를 감시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렇게 영화는 ‘표적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킬러’에 대한 이야기로 급변한다. 하지만 이 빠른 전개는 이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송강호가 연기한 ‘두헌’이 갑작스런 사랑 탓에 원래의 목표를 포기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사랑을 통해 구원되는 것이 이 극의 원래 방향이었던지가 모호하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파악하더라도 결국, 영상미를 위해 스토리가 희생되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롤리타, 혹은 마틸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부산으로 이주한 시점까지의 이야기는, 현재의 이야기 틀을 위해 희생된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 두헌은 실업자로 위장한 조폭의 삶을 청산하기 위해 부산에 왔다. 하지만 이 은둔이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 자신은 물론이고 관객도 모두 다 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동료들은 그를 찾아낼 수 있고, 그가 음식점을 열고 싶어 한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치 세빈(신세경)과의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 세팅된 설정처럼 그는 거기에 홀로 있다. 물론 부산이 선택된 데에는 ‘바다’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경에 대한 판단은 이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다만 왜 하필 ‘지방의 도시’에 두헌이 숨어 있어야 했는지에 담긴 의도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도피’라는 현상에 대한 시각화, 그리고 그 도피가 주는 ‘절망과 소외감’을 위해 부산이 선택된 것 같다. 이야기의 현실적 축으로 작용하지 않는 장소의 설정, 이는 캐릭터의 나이 차와 더불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연상시키기에 흥미롭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는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푸른 소금>은 절망과 소외에 싸여 도피하는 두 남녀를 중심에 둔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 설정은 이러한 인물구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변태 직전의 나비처럼, 두헌을 험버트에 비견하자마자 신세경의 ‘세빈’은 롤리타로 변신한다. 누에고치 같은 컨테이너 속에서 그녀는 친구와 함께 빚을 갚기 위해 조폭에 이용당한다. 그리고 세빈의 손에 총이 들리자 그녀는 마치 <레옹>의 마틸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푸른 소금> 전체를 봤을 때 세빈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이 극을 통해 성장하는가, 혹은 이 결론을 통해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얻어내는가? 이 소녀는 두헌에게 너무도 헌신적이다. 그리고 끝이다. 심지어 누아르적 팜므파탈의 기질도 그녀에겐 부족해 보인다.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을 불러오는 권력의 수행자가 아닌, 그저 운명의 여인으로서 세빈은 존재한다. 요부로서가 아닌 운명적 소녀로 세빈이 소개되면서 영화의 축은 본격적으로 도피로부터 ‘사랑’으로 방향을 튼다. 마케팅의 포인트와 다르게 극장에서 관객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 팝콘 같은 사랑이다. <푸른 소금>의 내부가 달달하게 채워진 데에는 신세경의 소녀가 한몫하는데, 그녀가 조금만 자신의 롤리타를 드러내도 영화는 이내 누아르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대신 멜로드라마의 여성 캐릭터처럼 사랑에 좀더 능동적인 주인공만이 남는다. 비중에 있어서 이는 멜로에 더 가깝고, 전체를 보아서는 누아르인 위치, 이 모호함이 두 명의 메인 캐릭터가 끝까지 고수하는 좌표다.

정제된 젠틀맨이 아쉬운 이유

누아르의 뼈대에서 시작되는 멜로드라마, 이렇듯 복합장르로 뿌리를 내리며 영화는 두 남녀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제 마음 놓고 롤리타와 아저씨와의 관계를 풀어나갈 차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는 분명 ‘음성적인 통로, 죄의식의 수반’ 등 관계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과 싸워야 하는 단계인데, 영화는 이를 무시한다. 모름지기 욕망은 윤리적 불안감과 심리적 긴장감을 수반할 때 더 강화된다. 그리고 이때의 불안과 긴장이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무장시킨다. 한데 이 순간 <푸른 소금>은 의외의 선택을 한다. 자극적인 소재를 태생으로 한 반면 영화는 자신이 가진 매력적인 금기를 사용하길 피한다. 그래서 선택한 자극은 짜기는커녕 설탕처럼 달다. 마치 가위를 사용해 누에고치에서 나온 나비처럼, 이 영화는 도피하는 침울한 사랑을 그린 여타의 작품들이 느꼈던 고통을 겪지 않은 채 변태한다. 남의 아내가 된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는 단테의 사랑이 궁정풍으로 승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이유, 에드거 앨런 포의 ‘애나벨 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녀들이 곁에 없는 슬픔이 아프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어도, 롤리타의 엄마와 위장결혼을 하면서까지 거리낌없이 롤리타에게 다가가던 소설 속의 험버트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독자는 없다. 이들의 비장미, 소설 속의 사랑은 고통을 견뎌서 아름답다.

하지만 <푸른 소금>은 추한 부분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 과도한 양념이 들어간 요리를 기획했지만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양념치기 꺼려한 것처럼,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방’이 되어야 할 두헌의 캐릭터는 결과적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정제된 젠틀맨으로 남는다. 영화 내내 주인공 남녀는 둘만의 공간에 남겨지길 회피한다. 심지어 엔딩에서조차 둘은 둘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남녀로서의 선을 넘을 것이라 추측되는 모든 지점에서 감독은 제3자의 관찰을 개입시키는데, 그리하여 그들의 윤리성이 객관적인 누군가에 의해 인정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영화는 안도하는 패턴이다. 장르적으로도 문맥적으로도 어느 한곳으로 안착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이미지에 사활을 건 것이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스크린의 이미지는 그것만으로도 스토리의 여백을 메우는 힘을 지닌다. 다만 그를 위해 이미지는 기호화되거나 이중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물론 영화 <푸른 소금>의 이미지는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는 스토리를 보조하는 데서 멈추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 속 이미지가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미장센이 스스로 의식화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푸른 소금>은 이 재현의 이중화에서 실패한다. 영화에 자주 드러나는 시선과 공백을 엇갈려 배치하는 프레임의 룩이나 특유한 색감들은 이미지 스스로의 명확한 의도를 드러내지 못한다. 애초에 설정된 죄의식을 극의 주인공이 회피했다면, 이때 영상이 갖추어야 할 미덕은 긍정적 아름다움의 발현이 아닌 ‘내면적 두려움을 표출해내는 통로’가 되어주는 역할이 아닐까 생각된다.

‘국민여동생’으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의 한 경향은 어제오늘의 유행이 아니다. 지난해의 <아저씨>와 더불어 올해 몇몇 영화 역시 이 ‘딸을 보호하는 아버지’에 대한 역할 바꾸기를 꾸준히 시도하였다. <최종병기 활>에서의 여동생을 보호하는 오빠, <푸른 소금> 속의 딸 같은 소녀를 보호하는 아저씨는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신보수주의의 결합을 통한 이중적 재현의 일련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대중문화의 영역에 다가갈수록 영화와 사회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다만 훨씬 더 다양해진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이미지는 혼자서 만들어지고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신세경의 롤리타에는 송강호의 관능미가 버티고 있고,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담는다. 이처럼 의미가 되기 위한 디딤돌, 아마 <푸른 소금> 속 이미지가 도달하고 싶었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비주얼의 향연 속에서 재현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좀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주관성이 내포한 예술적 재현은 오직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만일 이 영화가 애초에 지니고 있었던 조건들을 쾌락의 추구와 금기의 윤리적 함의를 드러내는 데 쏟았다면 어땠을지가 궁금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소금을 진정으로 사랑과 등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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