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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 가면을 가리키며 걷는 배우
김혜리 사진 백종헌 2011-10-17

<완득이> 유아인

유아인은, 길게 혹은 넓게 찍어야만 할 것 같은 피사체다. 1분만 지켜보라. 그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이완 혹은 이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미세한 몸부림. 고정된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고 인터뷰라도 녹화할라치면 어느새 프레임 밖으로 삐져나가 귀만 잡혀 있기 일쑤인 골칫거리. 지난 2년간 유아인은 TV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와 <성균관 스캔들>에서 바스트숏 혹은 그보다 더 바짝 다가선 프레임 안에서 누가 얼굴로 더 파장 큰 표현을 하는가를 겨루는 연기를 했고 호평받았다. <하늘과 바다> 이후 3년 만의 영화 <완득이>는 유아인에게 우선 육체적 해방감을 주었다. “몸이 편해지면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굳이 뭘 더 얹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내 본능이 보는 사람에게도 먹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완득이>의 완득은 놀랄 만큼 편안해 보인다. 문제아라고 불리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안정된 인격의 소유자로 보일 지경이다. 말하자면 따돌림받는 아이가 아니라 나머지 급우를 몽땅 소외시키는 아이. 그래서 동주 선생(김윤석)이 완득에게 행하는 ‘선도’(善導)는 불량 학생을 수렁에서 땅 위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숙하고 우월한 나머지 높은 곳에서 떠도는 애어른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뭇 사람들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에 가까워 보인다. 유아인이 끄덕인다. “그 애에겐, 오히려 성장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이 도움되는 일인지도 모르죠.”

가난, 주먹질,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삼촌, 가출한 필리핀계 어머니. 도완득은 애초부터 캐릭터를 규정하는 선명한 꼬리표가 줄줄이 달려 있는 인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녀석’으로 요약되는 그 숱한 변수는 연기자에게 단서였을까 짐이었을까. “굉장히 많이 생각했어요. 다만, 완득이의 환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게 아니라 거기 대응하는 완득이의 자세만 중요했어요. 완득이는 무기력할 수도 있지만 그냥 다 받아들이는 자세예요.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복 입고 라면 끓여먹는 연기를 하면서, 혼자 상 차려 TV 보며 밥 먹곤 하던 제 과거의 느낌이 많이 되살아났는데 당시의 저도 불행하거나 슬프진 않았어요.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죠.” ‘자세’는 글쓰기 습관을 가진 유아인이 요즘 자주 붙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지금 감정이 어떻고 내가 누구고 어디에 있다는 글을 쓰는 시기는 끝났고 이제 그런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할지 고민하면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반항이 그냥 현실이 되고 성격이 되다

언제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종대를 언급하지 않고 유아인의 연기를 말하게 될까? 완득이처럼 초식동물의 눈과 “당신들이 알아듣지 않아도 상관없거든” 하는 듯한 말투를 지녔던 10대 소년. 종대가 육교 난간 위를 걷는 아이를 올려다보는 위태로움을 불러일으킨다면 엄살을 모르는 완득은 유유하며 가끔은 삶을 구경하고 있는 듯 보인다. 스물한살 유아인과 스물다섯살 유아인 사이의 간극일까? <완득이>를 보는 동안 1년 전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길을 걸을 때면 한 발짝 뒤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며 걷기를 좋아했다던 그의 회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촬영 당시 동료들과 한 공간에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 젊은 신선처럼 미소 짓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노라던 민규동 감독의 관찰도. 유아인은 그러나 성장제일주의자가 아니다. “종대가 완득이보다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완득이처럼 지상으로 끌어내려지는쪽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여기게 된 지금의 제가 종대의 모습을 갈망해서일 수도 있어요. 저는 튕겨져 나오고 일그러지고 부서질 수 있는 것이 무결한 상태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종대가 부러워요. 이미 많이 포기한 완득이는 불행하다고 여기며 연기했어요.” 맞다. 유아인은 완득이를 가여워한다. “너무 착해서 불쌍했어요. 기껏 엄마를 만나서도 애인처럼 구두 사주고, 마침내 버스정류장에서 포옹할 때에도 제 안의 응어리를 먼저 풀지는 못하고 우는 엄마한테 (두팔을 벌리며) ‘제 품에 안기세요’ 하는 모양이 너무 조숙해서 불쌍했어요. 어떤 어른도 그를 한번도 아이다운 아이로 만들어주지 못하고 성인처럼 살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상황이 싫었어요.” 열일곱살의 엄홍식(유아인의 본명)은 완득이보다 단호했다. 완득이처럼 “학교 그만두면 안돼요?”라고 묻는 대신 그만둘 거라고 통보했다. “대단한 반대도 없었어요. 저는 큰 걸림돌이 없어서 반항이 그냥 현실이 되고 성격이 된 경우예요. 좀더 머리가 굵어진 다음에는 우선 저질러버리고 ‘죄송합니다. 사고쳤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의 편의를 터득했어요. 진심으로 사고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는데, 실은 사고가 아니라 내가 이런저런 생각이 있어서였다고 설명하고 이해받을 필요를 못 느꼈어요. 철없는 치기라고 나를 깔봐주는 것이 편했어요. 결국 중요한 건 어떤 행동을 하느냐니까 말이 앞서고 행동이 못 따라가느니 행동해버리고 말로 나를 죽여버리는 쪽이 나았어요.”

웃음과 눈물, 사건과 사고를 갈아타며 경쾌하게 달려가는 <완득이>의 영화적 스타일은 완득이라는 쓸데없이 속깊은 소년 캐릭터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무덤덤한 척이 몸에 밴 소년의 여린 속내를 들여다보는 데에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완득이 혼자 어머니가 만들어다준 짠 반찬을 꾸역꾸역 먹을 때, 어렵사리 심중의 한마디를 끄집어내는 순간, 영화가 조금 더 기다려주고 응시해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을 법도 하다. “완득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굳이 거기까지 들쑤실 필요가 없는 리듬으로 흘러가는 영화예요. 우리 영화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인물을 그리면서 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냐고 투정부리지 않고 미끈하게 다뤘다는 점이 만족스러워요. 절충점을 찾은 것 같아요. 그런 영화가 너무 없잖아요.” <완득이> 출연을 결정했을 무렵 유아인은 본능적 몸짓을 잃지 않는 가운데 경험으로 쌓은 기교를 결합하는 연기를 시험할 기회로 여긴다고 말했다. 영화가 완성된 지금 그는 인위를 통해서도 진짜를 표현하는 연기를 맛보려던 목표에 얼마나 근접했다고 자평할까. “결론적으로는 종대 연기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아니 그게 맞구나 하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기교를 부려도 내가 가진 것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게 하는 데 부려야지 온통 가짜 속에서 기교를 부릴 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가진 게 무한할 순 없잖아요. 누구보다 많은 ‘나’를 갖고 있다는 자신은 있지만.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연기할 수는 없겠다는 예감을 품기도 하나봐요.”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의 자유를 동경하다

<성균관 스캔들> 이후 유아인의 가파른 상승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이제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않은 자의 권력- 예전 그의 미니홈피 안에 출렁이던- 은 더이상 가질 수 없게 될 거라고. 대신 상품을 팔고 그의 취향을 대중이 선망하게 만드는 다른 부류의 권력을 획득할 것이라고. 유아인은 그러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을 더 많이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시잖아요. 전 아무 권력도 갖지 않은 자의 권력이야말로 진짜 권력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제가 새로 얻은 힘을 휘두르는 법을 몰라 버겁고 번거롭고 피곤해서인지도 몰라요. 그런 맥락에서 10대 시절이 최고라고 뭉뚱그려 얘기해왔던 거고요. 소유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의 자유와 파워를 향한 동경이 있어요. 심지어는 나락으로 추락해보는 것을 향한 욕망도 있어요.” 서슴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스타가 덤덤히 ‘끝’을 입에 올리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스스로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그 상상이 선명해질수록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니까, 그동안 인터뷰에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닌 게 허풍이었음을 느껴요.” 같은 이유에서 유아인은 앞으로 모든 작품을 유작처럼, 다른 곳으로 가는 가교로서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고 싶어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삶에 더 충실하게 되잖아요. (미소)”

아마 예전에는 배우로서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배우 생활의 마침표를 상상하게 했다면 이제는 백지에서 출발하는 완전히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의 결기로 그는 끝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치고 느릿하게 일어서는 유아인의 얼굴 위로 얼마 전 읽은 시의 마지막 연이 희미하게 포개졌다.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_심보선의 <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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