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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으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놀자꾸나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의 진짜 매력을 탐구하다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던 차다. 때마침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레스트리스>가 개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의 최고작이 아니라는 평가는 일찌감치 들은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이 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관람을 가로막지는 못하는 것 같다. 구스 반 산트는 이전의 영화들과 유사한 범주의 소재를 다루고는 있지만 완연히 다른 이야기와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레스트리스>는 과연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그러나 아직까지는 말해지지 않은 진짜 매력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본다.

소년과 소녀가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다. 소년의 이름은 에녹(헨리 호퍼), 소녀의 이름은 애너벨(미아 와시코스카)이다. 에녹은 지금 자기와 상관도 없는 사람의 장례식에 와 있다. 거기 와서 가족이나 친구 중 한 사람인 척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추모사를 경청하거나 고인의 창백한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다 발길을 돌린다. 벌써 여러 사람의 장례식을 그렇게 참관하던 중에 애너벨을 만난 것이다. 그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고 자신도 몇달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겨우 깨어났으며 지금은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고 다닌다. 반면에 애너벨은 말기 암 환자로 몇달 남짓의 생을 최종 선고받고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을 좋아하고 각종 동물들의 생의 역사에 관심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물새를 가장 좋아하는, 생에 대한 지극한 존중심을 지닌 이 씩씩하고 밝은 소녀는 그러나 자신의 이른 죽음만큼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두 사람이 장례식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후 영화는 죽음을 경험한 소년과 죽음을 앞둔 소녀의 러브 스토리로 흐른다.

적지 않은 평자가 <레스트리스>를 구스 반 산트의 범작 혹은 실패작으로 분류했으나(예컨대 <필름 코멘트>의 별점란에 짐 호버먼과 개빈 스미스는 별 다섯개 만점 중 별 하나씩을 부여했다), 로저 에버트는 애정이 짙게 묻어나는 호평을 남겼다. “구스 반 산트의 <레스트리스>는 죽음이라는 자신들의 성지를 본질적으로 숭배하는, 한 청춘 남녀에 관한 보기 드물게 감동적인 로맨스다.… (중략)… 이 이야기는 손쉬운 판타지 혹은 꿈같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라 시간의 냉혹한 행진으로부터 조금이나마 행복을 훔쳐내려는 두 인물의 시도이다.” 그는 시적인 문장으로 영화의 핵심적인 분위기를 잘 묘사해냈고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구스 반 산트의 무한한 관심거리 , 젊음과 죽음

다만 로저 에버트가 두 주인공의 첫 만남에 관해 설명하면서 에녹과 애너벨 그둘 모두 장례식 구경하기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고 말할 때, 거기엔 약간의 착오가 있는 것 같다. 애너벨은 아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장례식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병동의 친구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게임 중이었던 건 에녹이었다. 그러니 에녹과 애너벨이 처음 만났을 때 애너벨이 보이는 좀 이상한 행동은 사실 생각보다 더 이상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애너벨은 난생처음 만난 에녹에게 환하고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애너벨은 “요즘은 장례식장에 검은 정장을 입고 오는 사람이 없어서 네가 가짜 조문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는 식의 대사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설명이 그토록 환한 그녀의 웃음의 의미까지 밝혀내지는 못할 것이다. 애너벨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한눈에 에녹과 그의 행위를 간파한 다음에 함박웃음을 던져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애너벨에게 죽음이란 늘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괴상한 녀석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현실을 상대로 어둡고 어처구니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애너벨은 죽음이라는 이 현실이 누군가에게는 게임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그 게임의 탈출구로 자신을 인도해줄 괴짜 친구 혹은 연인이 지금 자기의 눈앞에 당도했다는 직관적인 반가움 때문에 애너벨은 웃는다. 마침내 함께 놀게 될 운명의 짝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녀는 웃는다. 이로써 게임의 일원은 하나 더 늘어날 것이고 그녀의 동참으로 이 게임의 분위기는 우울함에서 명랑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무한한 관심거리인 ‘젊음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레스트리스>에서 재등장한 것이다. 젊음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구스 반 산트의 폭넓은 관심을 끌어내는지에 관해서는 최근에 그가 <브레이킹 던>(!!)의 연출에 욕심을 냈었다는 사실 하나만 지적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젊음만큼이나 그에게 늘 가까이 있는 관심거리인 죽음, 그것으로 구스 반 산트는 그의 영화의 가장 위대한 시기 중 한 부분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한 ‘죽음 3부작’(<제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을 통과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레스트리스>의 젊음과 죽음이란 죽음 3부작의 그것과는 면모가 다소 다른 것 같다. 로저 에버트는 에롤 모리스의 영화 <천국의 문>에 등장하는 대사를 인용하며 이 다른 면모를 요령있게 압축했다. “죽음이란 망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레스트리스>에서의 젊음이란 죽음에 인접하여 고통스럽거나 안타깝거나 미스터리해지는 인물들의 시간이 아니라, 너무도 명료한 그 시한적 삶을 생생하고 소중하게 보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들의 시간이다. 죽음을 경험한 소년과 죽음을 앞둔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러므로 결국에 이런 질문을 품게 한다. 그들은 이제 함께할 짧은 생의 시간을 과연 어떻게 살아내는가.

이 점에서 구스 반 산트는 확신을 지녔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레스트리스>는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내는 삶에 관한 영화다. 애너벨은 죽을 것이다. 애너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에서 ‘있는 동안에는 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독의 이 말은 일단 도전적이면서도 좀 엉뚱하게 들린다. 특히 여주인공의 대사를 빌려서 한 그 말이 더욱 그렇다. 지금 놀자니 무슨 말인가. 그는 지금 주인공을 가리켜 죽지 않고 살기 위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표현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만은 놀겠다는 의지를 지닌 인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영화의 진실이다. 에녹과 애너벨, 그들은 어떻게 둘의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인가라고 우리는 앞서 물었는데, 대답은 이런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노는 것으로 살아간다. 에녹과 애너벨이 만난 이후로 그들의 삶이란 함께 노는 것이며 잘 사는 삶이란 함께 잘 노는 것이다.

두 배우와 얘기 중인 구스 반 산트(오른쪽).

놀이로서의 상연에 몰입하는 이유

여기 관련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간결성 내지는 단순성의 분위기다. 인물들은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으며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영화적 리듬도 단순하다. 이야기의 간결성 또한 그런 느낌에 한몫을 더한다. 에녹의 환상이거나 유령이라고 말해질 만한 가미카제 친구 히로시(가세 료) 부분을 제외하면 영화는 거의 서브플롯이라 할 만한 걸 지니지 않은 직선 구조다. 영화는 역전이나 반전이나 미스터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앞으로 또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구스 반 산트는 인물들이 그 선을 따라가며 놀이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보살핀다.

두 번째는 장소들의 뉘앙스다. 이 영화는 차라리 ‘한 장소에서 놀고 그 다음 장소로 이동하여 다시 다른 놀이로 노는 플롯’을 지녔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건 두 인물의 사랑의 행로와도 겹친다. 에녹과 애너벨이 함께 머물렀던 자리들, 그러니까 공터와 축구장과 영안실과 할로윈의 가장행렬이 열렸던 숲속과 그보다 더 깊은 숲속에 자리잡아 그들의 첫 섹스를 품어주었던 오두막과 그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집으로 돌아올 때의 바람 불고 비 내리던 골목길들.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이들이 머물렀던 주요 장소들을 다시 비추는데, 거기에 그들은 없고 그들이 남긴 그 장소의 시적 공기만이 남아 있다.

그들은 장소를 바꾸며 단순하게 논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건 주로 무엇을 하며 노는가이다. 에녹과 애너벨이 만난 첫 장면을 다시 말해야 할 것 같다. 애너벨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에녹이라는 단순히 가짜 조문객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매개로 놀고 있는 자의 등장을 알아본 것이다. 앞서는 게임이라고 칭했지만 이것은 소극적 퍼포먼스다. 그러니 애너벨이 즉각적으로 알아본 건 에녹이 무언가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그 놀이의 종류가 바로 일종의 퍼포먼스, 곧 상연이라는 점이다. 놀이로서의 상연, 이것이 영화 내내 이어지는 에녹과 애너벨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처음에 두 사람의 놀이의 형태는 단순히 타인들의 죽음을 더 가까이 관람하기 위한 영안실 방문 같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능동적으로 논다. 할로윈 데이의 가장행렬을 따라나서 외양의 아이러니와 유머로 죽음에의 공포를 밀어내보려고도 한다. 틈만 나면 바닥에 시체처럼 누운 다음 몸의 윤곽을 연필로 그려보는 시체놀이도 한다. 그러다가 더 많은 창의적 상연에 이른다. 그들의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의복을 걸치고는 그들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사는 것 같은 그들만의 상연을 펼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애나벨이 죽고 에녹이 남았을 때의 순간을 미리 예상하며 그 두 사람이 만들어보는 슬프지만 귀여운 한편의 짧은 연극이다. 그들은 이 상연의 연쇄들을 통해 죽음을 마주보고 밀쳐내고 끌어당기고 미리 경험한다. 적어도 지금은 함께 행복하게 살아 있다는 존재 증명을 스스로 해내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서로 함께 살아 있는 한 사랑하고 사랑하는 한 최선을 다해 놀고 노는 동안에는 상연한다.

두 배우의 싱그러운 존재감

이것은 소년소녀의 성장담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청춘의 극단적인 러브 스토리를 접하고 나면 이런 습관적인 정의를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레스트리스>는 그런 정의를 단호히 거절하는 영화다. 이것은 미숙한 연애담인데 이 연애담은 하나의 성장담이 아니라 기필코 놀이담이다. 그리하여 <레스트리스>에서 에녹의 주위에 늘 머물던 히로시가 그러니까 에녹의 친구이지만 애너벨의 눈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히로시가 어느 때인가 애너벨의 눈에도 보이는 순간이 올 때, 그렇게 에녹과 애너벨의 첫 만남 이래 영화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불가능의 순간이자 텔레파시의 순간이 올 때, 문득 그들의 놀이가 시작됐던 것처럼 문득 그 놀이를 끝낼 때가 온다. 물론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끝끝내 이 놀이의 끝을 어떻게 다시 한번 그들만의 방식으로 마감하는지는 이 영화의 라스트신이 여실히 보여줄 것이지만 말이다.

<레스트리스>를 구스 반 산트의 수작 반열에 올리는 건 우리 역시도 망설여진다. 죽음 3부작의 감격이 너무 컸던 까닭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어 보인다. 이 놀이담은 그 자체로 귀엽고 생기롭다. 황혼이 깃든 만물의 풍경들과 시적으로 더해지는 음악,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넘치는 편집, 그리하여 마치 산들바람이 몸을 만지고 지나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영화의 모든 좋은 점들, 그중에서도 불가사의한 몸짓과 표정을 순간마다 드러내는 두 배우의 싱그러운 존재감과 그것을 끌어낸 구스 반 산트의 사려 깊은 연출력이 가장 빛난다. <레스트리스>는 두 소년소녀가 재잘거리고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미아 와시코스카의 웃음은 언제나 물새 모양으로 자유롭고 헨리 호퍼(지난해 타계한 대배우 데니스 호퍼의 아들)의 고갯짓은 인생을 향해 던지는 물음표 같은 형상일 때가 많다. 아직 견고한 관습을 미처 갖추지 않은 이 두 젊은 생명체가 손잡고 기대고 웃고 입을 맞추고 뛰고 하는 그 생생한 운동과 감정의 리듬만으로도 <레스트리스>는 안아주고 싶은 음악적 감각의 소품이 된다. <레스트리스>는 때이른 죽음을 추모하는 정교하고 장엄한 장송곡이 아니다. 남아 있는 삶의 생기로 쉼없이 들떠서 들썩이는 놀이 행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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