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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데카르트의 고독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11-25

믿음과 의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초석을 놓은 이 유명한 명제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데카르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이 명제에 도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자. 심지어 내가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실은 악마가 내 두뇌에 일으킨 간교한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럴 때조차도 내가 생각하는 한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코기토의 철학

건물을 지을 때 초석부터 놓는 것과 같다고 할까? 데카르트는 이 자명한 명제 위에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 토대가 튼튼하면 건물이 흔들리지 않는다. 지식의 체계 역시 흔들리지 않으려면 토대가 확실해야 한다. 근대의 모든 사상은 다소간 데카르트에서 유래하는 이 정초주의(foundationism)의 경향을 갖고 있다. 오늘날에도 학술서적의 제목에 종종 ‘기초’(foundation)라는 건축의 은유가 사용되지 않던가.

이 자명한 명제로부터 데카르트는 다른 확실한 지식들을 도출하기 시작한다. 어느 시대에나 주도적 학문이 있게 마련. 17세기에 다른 모든 학문의 이상으로 여겨진 것은 바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에서는 ‘공리’에서 ‘정리’를, 거기서 다시 개별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연역법(induction)을 차용하여 데카르트는 이제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내 불완전한 기억을 용서하시라) 대충 이런 식이다.

내 머릿속에는 ‘신’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에서 나올 수는 없기에 ‘신’은 내가 만든 개념일 리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신의 개념에는 선함이 포함되어 있다. 선하신 그분이 세계의 존재에 대해 나를 기만하겠는가? 고로 세계는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이 방법적으로 의심한 모든 것을 다시 긍정한다. 물론 회의를 한번 거친 이 지식들은 이제 기하학적 명제만큼 ‘확실한’ 진리의 자격을 획득한다.

우리 눈에 데카르트의 논증은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기하학(이나 수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보지 못한 점이리라. 수학과 기하학의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것들은 (가령 ‘총각은 미혼의 남자’라는 명제처럼)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반면, 다른 학문의 명제들(가령 ‘지구는 둥글다’는 명제처럼)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참일 수 없고 오류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방법적 회의는 난센스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가 기하학의 이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확실하다’는 말의 문법을 오용했다고 지적한다. 가령 이렇게 말해보자.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 남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 남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 ‘확실하다’는 말이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은 차라리 이런 경우이리라. “다음 달에 경제위기가 올 것이 확실하다.” 이때 그 위기는 물론 안 올 수도 있다.

가령 ‘원은 둥글다’는 명제는 지식이 아니라 문법에 속한다. 즉 우리가 그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경우란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뿐이다. ‘원은 둥근 것이 확실하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해 수학이나 기하학의 명제만큼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것은 논리적으로 난센스다. 이런 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의 기획을 해체해버린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아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공격한다. 과연 데카르트처럼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심할 수 있으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더러 거짓말쟁이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인 세상은 상상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즉 대부분의 사람이 참말을 해야 비로소 ‘거짓말쟁이’도 존재할 수 있다.

아니, 거짓말쟁이 자신도 평소에는 대부분 참말을 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에 효과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믿음’과 ‘의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뭔가를 의심하려면 다른 대부분의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뭔가를 ‘의심’하는 언어놀이를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일단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데카르트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을 시도한 셈이다.

우리의 언어놀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 믿음의 세트를 비트겐슈타인은 ‘기본적 확신’(basic convictions)이라 부른다. ‘의심할 수 있으려면 일단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언뜻 듣기에 이는 매우 보수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기본적 확신’이란 (가령 비가 올 때는 비가 온다고 믿는 것처럼) 정말로 기초적인(basic) 것을 가리킨다. 주위에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얘기들은 무조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데카르트를 위한 변명

오늘날 데카르트 철학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자신의 사유를 이렇게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의 동시대인들은 여전히 중세적이었다. 그들은 ‘타율적’ 존재여서 진리를 자신의 사유가 아니라 외부의 권위에서 찾으려 했다. 그들에게 진리란 한마디로 국왕이 말하는 것이요, 교회가 말하는 것이요, 부모가 말하는 것이요, 주변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기획은 이 타율적 존재들을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로 바꾸어놓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유아론적 고독 속에서 언어의 문법을 거스를 정도로 급진적인 회의를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 급진적 회의를 통해 그는 고작 자신의 동시대인들과 같은 결론으로 되돌아갔지만(가령 ‘신은 존재한다’), 적어도 그의 결론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과 달리 ‘자율적’ 사유와 판단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아직도 어떤 사회에서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 거기서 사유나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은 개인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그의 의심을 처벌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기본적 확신(basic convictions), 즉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 의심없이 믿어야 할 사실들이 대부분 ‘기초적’(basic) 수준을 훨씬 넘어서곤 한다. 거기에 의심을 표했다가는 물론 소통의 장에서 당장 퇴장당한다.

때로 사회가 강요하는 믿음의 세트가 심지어 언어를 지탱해주는 그 기본적 확신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회적 소통은 종교성을 띠게 된다. 가령 기독교인과 대화하려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어줘야 하나, 우리는 ‘처녀’와 ‘잉태’가 서로 모순되는 개념임을 잘 안다. 하지만 무염수태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 교회에서 파문당하듯이, 그것이 아무리 허황된 것이라 하더라도, 주변에서 강요하는 믿음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 사회적 소통에서 배제당한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주변과 다른 것을 너무나 괴로워한다. 그 고통, 그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그들은 제 머리를 비우고 그 빈자리에 남의 생각들, 즉 주위에 떠도는 통념을 채워넣는다. 21세기라 하나, 이 사회에 데카르트의 이 위대한 고독을 견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가 저지른 모든 논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데카르트를 위대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