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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발효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의 상비약 <하얀 정글>
이영진 2011-11-30

이옥씨는 척추관협착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지만 아직까지 수술을 받지 못했다. 김순덕씨는 머리에 피가 터져 수술하느라 20년 동안 모았던 3천만원짜리 통장을 깨야 했다. 박진석씨는 고액이 드는 백혈병 치료를 거부하고 사망보험금을 타기 위해 죽음을 기다린 적이 있다.

<하얀 정글>을 지배하는 유일한 룰은 돈이다. 돈 있으면 누리고 돈 없으면 죽는다. 도시는 각종 병원들의 광고로 넘쳐난다. 하지만 서민들에게 병원 문턱은 여전히 오르지 못할 성벽이다.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환자들의 한탄을 방탄복 삼아 총 든 의사들을 상대한다. 리베이트를 받고 거액의 보형물을 삽입하고, 고가 장비 비용을 메우려고 과도한 검사를 시행하고, 더 많은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시간당 100명의 외래진료를 자처하는 의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부당진료에 대해 법적 소송을 건 환자에게 폭언을 가하는 의사도 등장하는데, 말이 의사지 가운 입은 조폭이다. 의사이기도 한 송윤희 감독은 불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의료 현실을 총성없는 전장에 비유하며, 대기업과 국가야말로 진짜 전범임을 밝히려 든다. <하얀 정글>이 다루는 의료 사유화의 문제는 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많지 않다. 의사가 직접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면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공개하는 의료인들의 하소연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고픈 이야기를 특유의 리듬과 호흡으로 날카롭게 벼렸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없진 않다. 그러나 공공 의료의 필요성으로 마무리하는 <하얀 정글>은 한-미 FTA 발효를 목전에 둔 시점에선 최소한 갖춰야 할 상비약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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