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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소품은 살아있는데…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빛과 그림자>

<후지TV> 개국 50주년 드라마 <불모지대>(2010)는 일본군 장교였던 이키 다다시(가라사와 도시야키)가 종합상사에 발을 들이고 회사를 키우며 한발씩 위로 올라서는 일본 경제성장기 배경의 시대극이다. 일터의 풍경이나 양복, 헤어스타일의 변화는 이키가 유행을 좇는 캐릭터가 아니라 유난하지 않은 편인데 그가 일에 매달린 사이 출퇴근하는 집의 거실 풍경으로 세월이 흐른다. 빈궁한 살림에서 시작해 가장이 승진할 때마다 조금씩 살림이 피고 좌식에서 입식으로 가구들이며 생활 스타일이 바뀌는 이키네 가정. 남의 나라, 안 살아본 시절의 성공담을 망연하게 구경하는 와중에 깜짝 놀란 장면이 있다. 차분하게 내조하는 이키의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며 수편물을 잡고 있는 모습이 나온 뒤, 곧 온 집안이 손뜨개 레이스로 도배가 된 장면이다. 이것은 남편을 일터에 빼앗긴 일본 여성의 원념이 담긴 수편물인가! 농담이고, 내내 조용하던 이키의 부인이 공간을 장악한 순간이다. 일본의 수편물 유행은 시간차를 두고 레이스 교본이나 시집갈 때 하나씩 구비해 가던 <여성대백과사전>의 홈패션 항목으로 수입돼 한국에도 집집마다 레이스 광풍이 분 적이 있었다. 우리 집 역시 어머니의 폭풍 뜨개질로 커튼이며 식탁보, 가구 커버들이 모두 레이스로 덮였고 어머니는 그래도 코바늘을 놓지 않았다. 일본 거실이나 한국 거실이나 시간차는 있지만 어떤 시절을 관통한 전국적인 유행이 스몄던 거다.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빛과 그림자>는 세트나 소품에 공을 들인 태가 역력하다. 1970년 지방 소도시의 극장을 물려받은 청년 강기태(안재욱)는 영화에 투자했다 사기당하고 쇼단을 유치해 위기를 모면하려 하나 그도 여의치 않다. 아직 인물들의 성격도 단선적이며 눈뜨고 당하는 사기장면도 긴장감이 부족해서 세트나 소품 구경하는 쪽이 재미가 더 크다.

극중 다양한 장소의 의자들을 비교해보면, 순양극장 좌석에는 극장이름과 자리번호가 프린트된 머리 커버가 씌워져 있고 공화당 후보의 응접실에는 가죽소파 머리와 팔걸이 부분에 흰 커버를 씌웠다. 보리수 다방의 소파는 두툼한 ‘비로도’ 천으로 감싼 소파에 나무 팔걸이, 다방이름과 전화번호를 프린트한 머리 커버, 여주인공 정혜네 미용실은 풀색 비닐 소재 소파에 테이블에도 비닐을 깔았다. 기태의 집으로 들어가면 노란 미송나무로 마감된 거실에 금성 텔레비전과 괘종시계며 문갑, 스탠드, 도자기와 분재가 여기저기 놓였다. 홈드레스를 입은 기태 엄마(박원숙)는 ‘양키 아줌마’가 가지고 온 미제 물건들을 늘어놓고 수다를 떨거나 자개장과 좌식 화장대가 놓인 안방에 누워 콜드크림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식모를 부리는 부엌은 식탁이 놓인 곳보다 한단 낮고 조각 타일을 깔아뒀다. 가스레인지와 풍로를 함께 쓰는 것도 옛날식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시대극과 비교하자면 여기저기 공을 들인 게 분명한데 어쩐지 성에 차지 않는다. 저 집에 사는 것 같은 사람은 그나마 기태 엄마 하나뿐. 다양한 장소들, 가구와 소품들에 주연배우들이 녹아들지 못하는 건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거나 인물이 장소를 장악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싸한 부엌을 만들어두곤 다 차려놓은 식탁 장면만 쓰고 다방에 가서는 대화만, 풍전 나이트에선 춤만 추는 식이다. 아직 초반인데 괜한 걱정인가 싶어도 이 드라마는 70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의 긴 세월을 다룬다고 하고 기태네도 머잖아 몰락할 판이니 세트며 가구들이 아까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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