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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차분한 로맨틱 코미디 <히어 앤 데어>

뉴욕의 가난뱅이 음악인 로버트(데이비드 손튼)가 어떻게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 사연부터 말하는 게 좋겠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인생 로버트는 남들이 말하는 패배자다. 하고 싶었던 음악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나이만 먹어 중년이 되었으며 지금은 셋방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다. 세르비아 출신의 젊은 이민자 브랑코가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는 브랑코의 애인과 위장결혼을 해 뉴욕으로 데려오면 5천달러를 주겠다고 한다. 당장에 돈이 급한 로버트가 그걸 거절할 이유가 없다.

로버트는 베오그라드로 날아간다.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상처와 아직은 불안정한 변화의 욕망으로 혼돈스러운 베오그라드. 누군가는 그를 경계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환대한다. 아들의 친구라고 소개받은 브랑코의 엄마 올가(미르자나 카라노비크)가 그중에서도 로버트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다. 그녀의 친절하고 사려 깊은 마음씨와 시인의 기질이 엿보이는 감수성에 로버트는 마음이 흔들리고 올가도 로버트를 좋아하게 된다. 로버트는 돈을 벌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러 베오그라드에 갔으나 거기서 문득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오랫동안 뉴욕에 머물며 영화를 공부한 경험이 있는 감독 다르코 룬그로프는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이 영화의 곳곳에 투영하려 했던 것 같다.“뉴욕에서 오랫동안 이삿짐맨으로 살았다. 나는 언제나 그 경험이 좋은 이야기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밴을 운전하며 가구와 박스들을 나른 5년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몇몇 현실적인 세부사항이 <히어 앤 데어>에 녹아 있다. … 2003년 나는 세르비아에 돌아왔다. 나는 곧 ‘변혁 국가’의 거친 현실에 대해 배웠다. 비록 모든 전쟁이 끝났으나 대부분의 젊은이가 여전히 다른 곳에서의 삶을 갈망했다. 이런 아이러니가 내게 <히어 앤 데어>에 영감을 주었다.”

로버트를 연기하는 데이비드 손튼은 팝 가수 신디 로퍼의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고, 닉 카사베츠의 영화를 비롯하여 비교적 소규모의 할리우드영화에 자주 출연해온 배우다. 어딘가 퉁명스러워 보이는 인상에 살집이 좀 있는 이 남자는 뉴욕에서는 그토록 한심해 보였지만 적어도 올가와 사랑에 빠지고 난 뒤부터는 낭만적인 멋쟁이가 된다. 그를 그렇게 변화시키는 올가 역은 세르비아의 유명 여배우 미르자나 카라노비크가 맡았는데, 그녀의 역량은 이미 <그르바비차>에서 입증된 바 있다. “활기찬 페이스와 놀랄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히어 앤 데어>는 사랑은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로맨틱코미디다”(<그린 시네 데일리>) 같은 칭찬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21세기의 <그린카드> 같은 영화가 될 것인가, 혹은 로버트가 브랑코의 애인과 별안간 사랑에 빠져 배신의 드라마가 연출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상상을 펼치려 할 즈음 로버트와 올가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다. 둘의 사랑은 의외지만 순수하기에 영화는 일순간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에 흠뻑 취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히어 앤 데어>는 어떤 희망이나 안식처를 약속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기와 저기, 뉴욕과 베오그라드 사이를 차분하게 오가며 그토록 멀리 떨어진 두곳에서 살아가는 삶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그 차이를 부각하는 과정에서 미니멀리즘 미학이라고 착각할 만한 심심한 장면이 다수 연출되지만, 몇몇 장면만큼은 큰 울림을 지녔다. 올가는 꽃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랄 거라고 로버트를 부추긴다. 실패한 음악가 로버트가 영화에서 딱 한번 연주를 하는데 올가의 테라스에 놓인 이 꽃들을 위해서다. 그의 짧고 보잘것없는 그저 그런 실력의 연주, 하지만 그걸 넉넉한 눈길로 지켜보는 올가, 그 앞에 놓인 수수한 꽃들, 그 너머로 보이는 황폐한 아파트와 이 건물과 저 건물 사이의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낮은 색소폰 소리. 음악, 그윽한 시선, 꽃, 황폐한 아파트라는 부조화가 이 상투적인 설정에 끝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기억할 만한 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적절히 조응하는 점도 미리 알려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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