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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여성으로서의 대처 그리고 나머지들'이라는 이분법 <철의 여인>

첫 장면은 기대 이상이다. 작은 식료품점의 한 귀퉁이에 서서 건장한 청년에게 줄까지 밀려가며 우유 한팩을 산 뒤에 겨우 집으로 돌아가는 저 노인이 아무리 봐도 그 유명한 영국의 전 총리 마거릿 대처(메릴 스트립)인 것 같다. 남편(짐 브로드벤트)과 함께 식탁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 그녀를 보며 우리는 은퇴한 정치인의 소박한 노년이 펼쳐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돌연 그녀의 남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처는 홀로 식탁에 남는다. 남편은 이미 사망했고 대처는 세상에 혼자 남았으며 지금 치매에 시달리는 중이다. 한때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육체와 정신이 허물어져버린 마거릿 대처에 관한 이 장면의 묘사는 조용하고 경건하며 리듬감이 가미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자연사(自然史)에의 한 수긍이다. 이 긴장감이 영화 전편에 가득하다면? 이 영화를 뛰어난 전기영화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는 이내 기대로 그치고 불행하게도 이후의 장면들은 대체로 평범하다. 영화는 마거릿 대처를 그리는 미지의 수사적 용기를 버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마거릿 대처를 포장하는 쪽으로 온순하게 회항한다.

1979년 보수당의 총수로서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되어 11년간 재직하며 강력한 정부의 상징적 인물로 정치판을 누벼왔고 전격적인 공기업 민영화 등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여 영국의 자본시장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처. 그러나 한편으로 가난하고 불행한 세대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대처리즘’, ‘대처의 아이들’이라는 부정적 신조어를 낳을 만큼 계층간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실직자를 양산한 신자유주의적 성향의 실패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처. <철의 여인>은 저 대처의 평가들이 있게 한 정치사를 영화에 펼쳐놓는다.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영국의 정치적 사건, 사고들이 대처의 삶을 따라 적절한 수위로 펼쳐진다. 그로써 영화는 한 정치가에 관한 평범한 전기영화가 되기를 자임한다. 다만 이 평범한 전기영화가 은밀하고 꾸준하게 강조하는 것이 있긴 하다. 특별히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대처가 한때는 제국을 호령한 철의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나약해진 한명의 노인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녀가 여성의 성공 신화로 말해질 만큼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노인 대처와 여성 대처. 영화는 노인 대처를 보여줄 때 그녀를 정서적으로 힘겹고 불쌍하게 그린다. 여성 대처를 그릴 때는 뚝심있고 맹렬하게 그린다. 이때의 영화적 묘사력이 나쁘진 않다. 하지만 ‘노인과 여성으로서의 대처 그리고 나머지들’로 영화를 이분화한 건 이 영화의 가장 안 좋은 선택이다. 대처는 실제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이 경우에 좋은 선택이란 선명하지 않은 사람은 선명하지 않게 그리고 모순의 인간은 모순으로 그리는 것이다. 혹은 기왕에 여성과 나머지, 노인과 나머지로 갈라서 치열하고자 했다면 정치가 대처와 나머지로도 갈라서 치열했어야 했다. 영화는 정치가 대처라는 부분에서 유독 스스로 힘을 빼고 먼 산을 구경하거나 말 그대로 사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두거나 스스로의 묘사력을 자제하는 인상을 준다.

메릴 스트립은 소문대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관록의 여배우 메릴 스트립은 일단 연기의 달인 이전에 모사의 달인이므로 대처처럼 목소리를 내고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꼬고 옷깃을 여미는 것이 그녀로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평자는 “메릴 스트립조차 이 끔찍한 전기영화를 구해내진 못했다”고 혹평했다. <철의 여인>이 그 정도로 끔찍한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조금 비겁하긴 하다. 쟁점적 인물에게 치열한 망설임 없이 순순히 믿음을 건넨 그 창작의 행위가 비겁하다. <철의 여인>의 감독은 쉬지 않고 치열하게 망설였어야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대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암울하고 풍자적인 정치 만화 <브이 포 벤데타>(“이 만화는 뉴스를 꺼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만화”라고 <브이 포 벤데타>의 그림을 그린 데이비드 로이드는 말했다)의 작가 앨런 무어의 의견이 궁금해지기는 한데, 전작으로 <맘마미아!>를 연출하고 두 번째 연출작으로 <철의 여인>을 만든 필리다 로이드의 세 번째 연출작은 그다지 궁금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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