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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이 화려하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가비>
이영진 2012-03-14

“그저께 밤에 카피차를 황태자 전하께서 많이 진어하신 후 곧 피를 토하시고 정신이 혼미하샤… (중략)… 황상폐하께서는 조금 진어하신 후 토하시고 근시 김한종 김서태 양씨와 엄상궁이 퇴선을 맛본 후 김한종씨는 곧 호도하여 불성인사하매 업어내어가고 하인 넷이 나머지를 먹고 또 병이 들었다 하니… 수라 맡은 사람들의 조심 아니한 것은 황송한 일이로다.”(강준만·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24∼25쪽) 1989년 9월에 발생한 고종 독살 음모사건은 김탁환의 소설 <노서아 가비>의 출발점이었다. <노서아 가비>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시절에 세도를 부렸던” 역관(譯官) 김홍륙이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게 되자 고종이 즐겨 마시던 가비차(커피)에 독극물을 넣은 사건을 바탕으로 하되,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다 조선에 돌아와 조정을 상대로 위험한 거래를 벌이는 상상의 캐릭터를 빚어넣었다. <노서아 가비>를 원작으로 삼은 장윤현 감독의 다섯 번째 상업영화 <가비> 역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와 ‘간 큰 사기꾼’ 이반이라는 원작 속 인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을 묘사하고 배치하는 방식은 <노서아 가비>와는 사뭇 다르다.

연인 사이인 일리치(주진모)와 따냐(김소연)는 군용열차를 털어 엄청난 양의 커피와 금괴를 수중에 넣지만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군에 붙잡힌다. 총살당할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을 구한 이는 사다코(유선)다. 러시아군을 매수해 일리치와 따냐의 목숨을 손아귀에 넣은 사다코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박희순)을 독살하고 조선군을 무력화하려는 일명 ‘가비작전’을 강요한다. 따냐를 살리기 위해 일리치는 사다코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본군 장교 사카모토 유스케로 변신해 고종에게 접근한다. 따냐 역시 가비작전에 투입되어 사다코의 감시를 받는다.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러시아를 찾은 대신들의 눈에 띈 따냐는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과 커피 내리는 솜씨를 인정받아 고종의 바리스타가 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뒤 의심이 많아진 고종의 신뢰를 얻으려고 애쓴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가 비작전’은 그러나 조금씩 복잡해지고 틀어진다. 고종의 비밀 지시에 따라 러시아 무기상과 거래하려는 의병들을 제거하는 일리치와 달리 따냐가 고종의 인간적인 고뇌에 이끌리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장윤현 감독은 원작의 독특한 캐릭터에 사로잡혀 영화화를 결심했다지만, 완성된 <가비>는 러시아와 일본의 이권 쟁탈 틈에 낀, 19세기 말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에 주목한다. 원작이 혼란의 시기를 거슬러 상상의 도약대로 삼았던 것과 달리 <가비>는 외려 이를 충실하게 재연한다. 일례로 원작의 이반과 따냐는 애국심이나 충절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다. 심지어 “조선 국왕에게 가는 러시아 황제의 선물을 가로채”려는 계획을 실행할 정도로 뻔뻔하고 대담하다. 반면, <가비>의 일리치와 따냐는 무국적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유전자엔 ‘조선인’이라는 인장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고종에 대한 따냐의 마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일리치가 따냐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자책하는 건 비단 따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가. 원작에 없는 사다코를 등장시켜 조선인 출신으로 설정한 것이나 궁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제국 건설을 위해 분투하는 고종의 면모를 강조한 까닭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비>의 인물들은 몇년 뒤면 일본의 속국이 될 조선의 운명을 미리 자신의 고통으로 체험하는 듯하다.

그러나 병풍이 화려하면, 그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비>의 장점은 곧 단점이기도 하다. 시대상황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으나, 이를 단단히 결박하진 못한 탓이다. 인물간의 갈등은 도드라지지 못하고 어지러운 사건 전개 속에 묻히고 만다. 따냐와 일리치와 고종의 삼각관계 혹은 사다코까지 포함해 사각관계를 밀도있게 그려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아쉬움이다. 따냐와 고종, 일리치와 사다코, 이들 사이의 동정과 연민을 효과적으로 보여줘야만 “불행한 시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부각될 텐데 <가비>는 그 점을 간과한다. 일리치가 고종을 향해 “저만 바라보던 그녀가 전하를 만나면서 조선을 품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고종이 따냐에게 “목숨을 걸고 널 지키려 했던 남자에게 가라”고 명할 때, 사다코가 일리치를 바라보며 “난 당신을 선택했고 모든 걸 내가 책임져야 돼요”라고 말할 때, 정서적 울림들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배우들의 세련된 복식을 과시하는 것보다 인물들의 감정지도를 더 세밀하게 그려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한 남자에게 가비는 사랑이다. 다른 한 남자에게 가비는 제국의 꿈이다”라는 따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공허하게 들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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