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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전쟁이자 롤러코스터 함수
이영진 2012-04-03

“그 몇분 동안 두 사람은 격렬하게 다투었다. 여자는 얼굴이 벌게진 채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을 휘저으며 남자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남자는 한손을 여자의 어깨에 올리고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몸짓은 여자를 더욱 화나게 할 뿐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드잡이를 그만두고 각자의 비행기로 돌아갔다.”(존 하일먼?마크 핼퍼린, <게임 체인지>, 245쪽) 연애소설의 한 대목이라고 해도 속을 것 같다. 2007년 12월, 워싱턴 로널드 레이건 공항의 활주로 위에서 낯뜨거운 사랑(?) 싸움을 연출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버락 후세인 오바마와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었다. 당시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출사표를 던진 양쪽 진영은 레이스 시작 전부터 한치의 물러섬 없이 으르렁거렸다. 힐러리에게 오바마는 풋내기였고, 오바마에게 힐러리는 늙다리였다.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네거티브 공습이 연일 계속됐으며, 급기야 위에서 말한 전대미문의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정치는 친구도 적으로 만드는 비정한 전쟁이다. 적과도 사랑에 빠지는 위험한 로맨스다. 오바마와 힐러리는 한때 믿음과 신뢰를 주고받던 친구였으나 이제 힐난과 비방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적이 됐다.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라탄 두 사람은 각자의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는 “힐러리의 눈에서 뭔가를 읽었다”고 했고, 힐러리는 “오바마는 굉장히 안달하고 겁을 내고 있다”고 했다. 오바마와 힐러리의 마음은 똑같았다. 그들은 상대가 평정심을 잃었으니 후보 지명은 따논 당상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뒤 어떻게 됐을까? 1년 뒤 권좌를 틀어쥔 오바마는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앉혔다. “제안받는 순간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힐러리는 오바마의 청을 받아들였다. 정치는 반전의 연속이고, 예측 불가능한 게임이다. 오바마가 뒷걸음질치면 힐러리는 전진했다. 힐러리는 더이상 ‘오바마 에어’의 부기장이 아니다. 올 연말 미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의 인기는 더욱 치솟고 있다. 4년 전 오바마의 기세처럼.

정치는 전쟁이자 롤러코스터 함수

<킹메이커>의 원제는 ‘The Ides of March(3월15일)’다.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배신의 칼에 쓰러졌고, 그 ‘운명의 날’이 3월15일이었다. 만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음의 예언을 비껴갔다면, 3월15일은 그가 황제로 등극할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킹메이커>의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마이크 모리스(조지 클루니)에게도 3월15일은 결전의 날이다. ‘오하이오 프라이머리(primary, 정당 당원이 아닌 일반인까지 참여해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할 대의원을 뽑는 예비선거)’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아칸소 상원의원인 풀먼을 큰 차이로 따돌리며 앞서고 있으나 만에 하나 ‘오하이오 프라이머리’에서 덜미를 잡힌다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 때문에 마이크의 선거캠프 본부장인 폴 자라(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오하이오 프라이머리에서 마이크 모리스가 9%의 우위를 보일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356명의 대의원을 확보하고 있는 톰슨 상원의원과 협상에 나선다. 그동안 중립을 선언해왔던 톰슨과 그의 대의원들이 마이크를 지지하고 나서면 오하이오에서의 승리는 물론이고, 전체 경선 판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선거의 유일한 법칙은 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은 이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정치는 수많은 변수들을 기꺼이 허용하고 끌어들이는 롤러코스터 함수다. 어떤 수단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섣불리 단정할 수 없으나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마이크 선거캠프의 유능하고 명석한 홍보담당관 스티븐(라이언 고슬링)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풍문으로만 떠도는 풀먼의 부동산 불법 투기 의혹을 언론에 흘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이크가 의도에 반하는 공약안을 결국 받아들이는 건 “그래야만 이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에 설복당해서다. 경쟁자를 이길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은 없다. 백악관 입성을 고대하는 <킹메이커>의 인물들이 다 함께 공유하는 유전자 명령이다. 물론 스티븐은 아직 노회한 정치꾼이 아니다. 그에게는 정치꾼들이 오래전에 내다버린 순진한 믿음이 있다. 야망까지 겸비한 이 정치 신인은 마이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폴은 승리만을 믿고 이기기 위해 뭐든 하죠. 전 제가 믿는 한 뭐든 합니다.” 마이크 역시 뒤가 구린 정치인 중 한명에 불과하다는 <타임> 기자 아이다(마리사 토메이)를 향해 스티븐은 마이크야말로 국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잘라 말한다.

스티븐이 마이크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티븐은 바로 그 확신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 스티븐과 다르게 폴은 끊임없이 내일을 의심한다. 폴의 성향은 태생적인 기질이 아니라 정치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샴페인을 일찌감치 터트렸는데 곡소리나는 결과가 벌어진다면? 돌아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조롱이다. 정치는 전쟁이다. 적은 나의 급소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더듬이를 작동한다. 풀먼의 선거캠프 우두머리인 톰 더피(폴 지아매티)가 스티븐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보자. 톰은 스티븐의 놀라운 수완을 높이 사며, 대담하게도 스카우트 제안을 던진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만만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마이크 대신 풀먼에게 표를 던질 것이며,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톰슨 상원의원 역시 국무장관직을 약속한 풀먼에게 돌아섰다고. 스티븐은 톰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그 자리에 나간 것만으로 덫에 걸려들었다. 경솔한 행동을 나무라는 폴에게 상대편으로부터 얻은 고급 정보를 전할 때조차 스티븐은 모르고 있다. 그깟 정보를 얻기 위해 아군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점을 말이다.

거듭되는 반전, 정치 그 자체가 스릴러

흔히 정치 계파들을 마피아 조직에 비유한다. 조직원들은 충성을 맹세하고, 보스는 그 대가를 지불한다. <킹메이커>의 선거캠프 역시 마찬가지다. 스티븐은 폴을 위해 일하고, 폴은 마이크를 위해 일한다. 엄격한 위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정치권의 알 수 없는 복마전이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출항을 앞두고 배가 가라앉는 사태에 직면한 마이크호(號)의 위기와 혼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외부의 급작스런 반격이 아니라 내부 위계의 붕괴 때문이다. 폴은 더이상 스티븐을 신뢰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면? 특종을 노리는 기자 아이다는 스티븐에게 묻는다. 톰과 만나서 무슨 밀담을 나눴느냐고. 아이다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폴과 톰슨 사이에 이뤄졌던 은밀한 만남, 그러나 실패한 협상을 까발리겠다고 협박한다. 누가 아이다에게 기밀을 흘린 것일까. 스티븐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 톰이 아니라 폴이다. 폴은 “이 더러운 정치판에서 의리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며 스티븐을 해고한다. 감히, 의리를 판돈 삼아 성공을 저울질한 벌이다. 그러나 스티븐이 폴에게 자신도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권력욕을 일찌감치 자백했다면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그는 어쩌면 더 빨리 배제되지 않았을까.

“나는 굳이 이 영화를 ‘정치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중략)…정치를 다뤘다기보다 ‘정치’라는 라운드에 오른 이들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연출까지 맡은 조지 클루니의 말이다. 조지 클루니는 오바마와의 친분을 감안한, 그래서 가능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미리 차단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연설로 대중을 감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구체적인 대안 제시에는 미흡한 마이크에게서 대통령 후보 오바마를 연상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한편, 조지 클루니의 이같은 제작 의도는 본격 정치영화로서의 <킹메이커>에 대한 자신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 속 정치인들의) 범법행위, 뒷방거래, 권력놀음 등은 모두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민주적) 절차를 조정하는지 알게 되면 정말 두렵다. 정석대로 하면 대통령으로 뽑히지 못한다.” <킹메이커>는 연극 <Farragut North>를 원작으로 삼았는데, 원작자인 극작가 보 윌먼은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 중 한명이었던 하워드 딘의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그래서 직접 정치인들의 책략과 술수를 지켜볼 수 있었다. 세치 혀로 상대를 제압하는 놀라운 정치 기술자들의 생생한 대사는 원작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셈이다.

아직 털어놓지 않은 인물이 있다. 몰리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마이크 선거캠프의 인턴으로, 스티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그녀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는다. 마이크의 유혹에 넘어가 관계를 맺었고, 급기야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의 이면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사했다는 것만이 정치영화 <킹메이커>의 재미는 아니다. <킹메이커>는 체스판 위의 말보다 체스 룰에 더 관심을 갖는다. 진짜 주인공은 정치인이 아니라 추악한 정치, 자체다. 마이크의 선거캠프에서 내쫓긴 스티븐이 찾아간 곳은 그가 한때 거부했던 풀먼의 선거캠프다. 마이크를 한방에 보낼 수 있는 약점을 들고 찾아온 스티븐을 톰은 어떤 얼굴로 맞았을까. 과연 그는 얼마 전처럼 스티븐을 환대했을까. 제작진은 <킹메이커>를 정치 ‘스릴러’로 봐달라고 했다. 후반부에 스티븐이 ‘몰리 스캔들’을 통해 어떻게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지, 그리고 권력의 위계가 어떻게 새로 구성되는지를 보라. 긴장은 스릴러라는 형식이 아니라 정치 특유의 생리를 제대로 포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다. 쟁쟁한 배우들의 차가운 얼굴에, 정치에 대한 환멸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주입하면서, <킹메이커>는 권력의 가면을 빠르게 벗겨내는 데 성공한다. 쉽지 않은 도박이었으나 조지 클루니는 결국 판돈을 잃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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