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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환자와 그 가족을 따스히 어루만진다 <비버>
김성훈 2012-04-11

병이 간사한 건 환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전염성이 바이러스 못지않은 우울증은 특히 그렇다. 환자와 그의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다가도 상처를 주고, 화해하다가도 다시 다투는 과정을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차라리 과거를 리셋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편할까.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면 된다.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맞다. 그게 가장 어려운 과제이자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비버>의 월터 블랙(멜 깁슨)과 그의 가족 역시 이 난제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폐인도 이런 폐인이 없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이자 장난감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장인 월터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낼 만큼 무기력한 남자다. 정신과 진료도 받아보고, 우울증 극복 치료법도 해보고, 약물에 의존해보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병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가족은 지칠 대로 지쳐간다. 아내 메러디스(조디 포스터)는 일중독자가 됐으며, 맏아들 포터(안톤 옐친)는 ‘눈썹 지압’, ‘목 꺾기’, ‘입술 깨물기’ 같은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습관을 기록하며 아버지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막내아들은 “투명인간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학교에서 왕따가 되었다. 월터가 아내에게 별거 요청을 받은 것도 이때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월터는 샤워실에서 목을 매달다가 실패한 뒤,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몸을 내던지기 직전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어이!” 하는 소리의 정체는 자신의 왼팔에 달린 인형 ‘비버’였다.

비버는 월터의 초자아(슈퍼에고)이다. 하릴없이 잠만 자는 월터에게 비버는 “이 한심한 놈아, 일어나. 넌 변화가 필요해. 중요한 건 지금보다 나아지려는 의지가 있다는 거야”라고 몸을 일으킨다. “스웨덴에서 유행한다”는 이 치료법 덕분에 월터는 다시 가정에 충실하게 되고, 그가 고안한 비버 목재 공구 세트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회사는 재정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버>는 ‘한 중년 남자의 우울증 극복기’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러나 감독은 남아 있는 사람, 그러니까 월터의 가족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항상 왼손에 비버 인형을 들고, 비버 말투로 말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아내는 “언제까지 그 인형을 가지고 다녀야 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안될까?”라며 과거의 남편으로 돌아오길 부탁한다. “(아버지와 닮은) 나를 버리기 위한 여행을 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친구들의 숙제를 대필해 용돈을 버는 아들 포터 역시 인형에 의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학교 ‘퀸카’ 노아(제니퍼 로렌스)가 졸업식에서 낭독할 연설문의 대필을 부탁한다. 알고보니 노아 역시 과거의 상처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아이다. 이처럼 월터를 비롯해 아내 메러디스, 아들 포터, 포터의 친구 노아 등 영화 속 인물들은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또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서서히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꼬마 천재 테이트>(1991)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조디 포스터는 <홈 포 더 할리데이>(1995) 이후 거의 17년 만에 세 번째 연출작을 내놓았다.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한 중년 남자의 처절한 몸부림은 물론이고 환자의 주변 인물 하나하나를 어루어만지는 솜씨가 제법 유려하다. 멜 깁슨과 조디 포스터, 안톤 옐친과 제니퍼 로렌스 등 배우들은 어디서나 볼 법한 상처 많은,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현대인을 안정적으로 표현해낸다. “살다보면 별꼴을 다 겪는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라. 서로 존중하고,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얘기하면서 살아가자”는 극중 대사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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