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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웃어드립니다

위트로 무장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블랙코미디

‘하이킥’ 시리즈 중에서 가장 문제작이지만 그에 합당한 주목을 덜 받은 것이 바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지목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노골적으로 블랙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보다도 더 정공법을 택했다고 할까, 그래서 시청자에게 현실에 대한 위트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위트는 현실에 대한 재치있는 비틀기인데, 약간의 냉소가 묻어 있는 유머의 기법이다. 전작에 비해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런 위트의 특성을 많이 살려서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상당히 뒤틀린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전 시리즈에서 ‘하이킥’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다르게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극중 캐릭터는 현실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형이기도 하다. 전형은 현실을 비례적으로 재현하는 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전 시리즈에서 현실은 상당히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짧은 다리의 역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암울한 취업준비생이 나오고, 우울한 청소년 교육현장이 그려진다. 또한 부도를 맞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중소기업 사장과 그 가족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게 규범적인 ‘의사들’이 과장되게 그려진다. 익숙한 현실이 되풀이되는데, 어딘가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다.

극중 한명은 나와 겹친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베르그송이 언급한 웃음의 원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짧은 다리의 역습>은 자연스럽지 않은 뻣뻣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의 본질을 구현한다. 슬랩스틱은 아니지만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가 담고 있는 정서를 이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채플린 영화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랑자와 겹치면서도 헤어진다. <짧은 다리의 역습>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두 갈래로 나눠서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한참 웃다가도 뒤끝이 남는다. 극중 캐릭터 중 한명과 자신이 반드시 겹치기 때문이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 환기시키는 현실은 이렇게 웃음 뒤에 남겨지는 ‘씁쓸한 실감’이다. 물론 코미디이기 때문에 상황은 슬픔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슬픔이 발생할 지점을 웃음으로 대체하는 것이 전략이다. 시청자가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바로 아이러니의 상황이다. 웃기지 않은 현실이 웃음의 소재로 바뀌는 순간을 곳곳에 숨겨뒀다.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호흡을 따라가면서 웃음보가 터진다. 그러나 삽입되는 웃음소리는 웃어야 할 지점을 시청자에게 알려준다. 웃음은 처음부터 극을 구성하는 요소로 설정되어 있다.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웃음의 지점들을 정해놓음으로써 시청자를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평등의 실현을 논의하며 소통하기

‘웃음의 유도장치’ 덕분에 하이킥 시리즈는 시청자와 호흡하는 통로를 설치할 수 있다. 현실을 대신 웃어주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역할이다. 현실에서 ‘이게 사는 건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탄식할 때, 하이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이들을 대신해서 웃어준다. 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시청자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누구도 혼자 웃을 수 없다. 모두가 웃는 것이다. 웃고 싶지 않더라도 웃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킥 시리즈가 평등주의를 설파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평등주의에 집착했다면, 하이킥의 결론은 훨씬 윤리적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복잡한 공리주의의 논쟁을 택하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특징이다. 결국 평등은 실현되는 것이지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는 것이 이를테면 하이킥 시리즈가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이킥 시리즈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도덕과 비도덕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마치 ‘바보들의 배’처럼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군상이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현실에 대한, 방향성 없이 무질서한 묘사들을 보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짧은 다리의 역습>의 경우는 현실에 대한 풍자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무질서한 현실성을 그려내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거부감을 줄 수 있다.

특정 현실의 거울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웃고 즐겨야 할 코미디가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맞지 않은 옷을 걸친 형국이 되어 외면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한계를 여유롭게 넘어서고 있다. 상호 참조를 통해 이야기들이 서로 교직되게 만드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은 <짧은 다리의 역습>이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이킥 시리즈를 봐온 이들에게 이런 카메오 출연은 이전 시리즈에서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찾게 한다. 대중문화 내에서 참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장르화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이킥 시리즈가 단순한 연작의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코드로 독특한 장르의 논리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자가 발전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일종의 문화코드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해당 시리즈마다 시시각각 변해온 정서들을 담고 있기에 하이킥 시리즈는 특정한 시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백진희

20대의 표상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캐릭터는 백진희이다.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백진희가 극중에서 가장 ‘현실’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대체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백진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실체적으로 재현되지 않는 20대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고시원에 살고, 밥을 굶고, 온갖 사회의 협잡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이 사회에서 20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백진희가 특히 ‘궁상맞은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그는 악역이다. 캐릭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그렇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열기구를 붙잡아두는 모래주머니 같은 존재가 백진희이다. 신세경이 시리즈 전체를 주도하던 관찰자였다면, 백진희는 가끔 등장하는 주변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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