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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의 ‘쪽’ - 아름다운 한결같음

배우 배두나와 나란히 서다

영화 <코리아>의 에필로그에 스치는 탁구 남북단일팀의 리분희 선수와 현정화 선수의 실제 사진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헤어질 시각이 다가왔을 무렵 촬영된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 속에서 리분희 선수는 석별의 정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현정화 선수는 예의 피노키오 같은 콧날과 나란한 각도로 시선만 가만히 떨구고 있었다. 리분희 선수로 분한 배우 배두나를 닮은 쪽은 도리어 현정화 선수였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인 리분희 선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배두나의 분신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말만, 그중에서도 거두절미한 몸통만 뚝뚝한 말씨에 실어 쓱 내미는 <코리아>의 리분희를 보고 있으면 배두나가 왜 그녀를 해석하고 체화하겠다고 의욕을 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몇 차례 인터뷰에서 만나본 배두나는 알고 느끼는 바를 쏟아내기보다 머금고 있는 사람이고 특히 본인의 어려움이 화제가 될 때면 말이 더욱 짧아지는 드문 여자다. 대화 끝에 슬픔과 조바심이 치밀어도, 그것들은 용케도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만 소용돌이친다. 그래서 이에 감응한 인터뷰어가 이유도 모른 채 먼저 글썽이는 낭패를 겪곤 한다(이 난처한 순간은 고현정과의 이날 대화에서도 종종 찾아왔다). 연기의 특징도 상통한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 예술가들에게 미니멀리즘이란 뭔가를 덜 하는 작업이 아니라 가장 많이 덜어내는 인고의 작업인데, 배두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해치워버리는 몸을 가진 배우다.

무조건적 ‘스킨십’이 우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고현정과 배두나는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친분이 널리 공개된 적이 없어도 멀찌감치서 믿거라 하는 사이다. 정직한 톤은 공유하면서도 색채와 질감은 딴판인 서로의 연기를 챙겨보는 일도 두 배우의 즐거움이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몇몇 진한 교감의 기억은 이 느슨한 관계의 거멀못이다. 고현정이 동료 배두나에게서 보는 매력을 표현하느라 쓴 서너 가지 표현은 “한결같다”로 수렴한다. 그것은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지루한 일관성이 아니라 반대로 배우로서 정주하지 않고 계속 정직하게 모색하는 태도의 여일함에 대한 감탄이며, 13년간 일일극부터 외국영화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한 작업 환경 속에서도 놀랄 만큼 닳아지지 않는 배두나 특유의 아우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울며) 일일이 지켜봤다는 고현정은, 정작 인터뷰 시점까지 <코리아>를 관람하지 못했다. 조만간 극장을 찾을 그녀는 이번에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코리아>의 배두나는 심지를 보존한 채 숙성했다. 호기심으로 세계를 살피던 소녀의 눈동자는, 보살피는 눈빛까지 담게 되었다.

적당한 인력과 척력, 삼가는 마음이야말로 두 인간이 상대 주변에서 오래도록 공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믿는 고현정에게, 예민하게 알아들으면서도 진중히 반응하는 배두나는 썩 어울리는 대화 상대였다. 영화에서 자주 그랬듯 배두나는 응시와 경청으로 위로했고, 고현정은 엄격히 말을 다듬어 생각의 핵심에 같이 닿고자 했다. 그저 경계(警戒)를 해제하기 위해 여자들이 쓰곤 하는 과장스럽게 다정한 제스처 없이도, 충분히 친밀(親密)한 오후. 과하게 달콤한 것이 있었다면 오직 두 배우가 들이켠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뿐이었다

고현정_‘쪽’이 정규 코너가 된 뒤 여자 인터뷰이는 두나씨가 처음이네요. 궁금한 사람, 평소에 못 만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다보니 주로 남자, 그리고 음악인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배두나_(웃음) 저라도 가수가 더 궁금할 거예요. 배우는 작업하는 프로세스를 다 아니까.

고현정_내가 가진 배두나라는 배우의 인상은 우선,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웃음) 예를 들어 피차 형편 때문에 연락한 지 오래됐는데 일 때문에 서로가 필요해서 갑자기 찾는 일이 생기잖아. 이번에 이런 영화를 찍었으니 와서 보라거나, 내가 토크쇼를 하니 나와달라거나. 연예계에서는 대개 그렇게라도 연락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두나씨는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내 생각에도 진짜 친분은 “내 프로그램에 섭외하고 싶지만 실은 이런 장단점이 있다. 너도 필요하다면 모르지만 나와의 관계 때문에 무조건 응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까지 포함해서 연락하는 게 아닐까 싶고.

배두나_(끄덕이며) 사실 <코리아> VIP 시사회에 고현정 언니를 초대하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어요. 제가 연락드린 지 너무 오래돼 그럴 순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이슈가 되면 영화에는 좋겠지만 제게는 언니와의 개인적 관계도 귀하기 때문에 갑자기 그런 식으로 부탁드릴 수가 없었어요.

고현정_또 앞뒤가 맞는 사람이라는 것. 필모그래피도 다양하겠다, 변하려면 변할 소지가 참 많은데 한결같아요. 대중은 몰라도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 감지하는 변화가 있잖아. 인터뷰의 미묘한 말투라든가 사진 찍히는 모습에서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두나씨의 그런 일관성은 어쩌다 일하는 상황이 모양새가 덜 만들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의 아우라와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그리고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란 것도 알아요. (웃음) 몇해 전에 두나씨가 시간을 오래 들여 찍는 카메라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내가 관심을 보였더니 카메라를 선물한 것도 모자라 직접 찾아와 설명까지 해줬잖아.

배두나_좋아하는 사람한테만 그래요. 하하. 그 카메라가 롤라이(Rollei)였나? 저야말로 언니처럼 못해요. 5년 전쯤인가 진짜 마음이 아플 때 언니한테 전화를 했어요. 워낙 어려서부터 팬인지라 어렵기도 하고 평소 귀찮게 해드리기 싫어서 자주 연락은 안 드렸는데 이성을 잃을 만큼 힘드니까 이성을 놓고 전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하하. 근데 언니가 딱 알더라? “너, 울려고 전화했지?” 그랬어요. 통화로는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엄살이냐고 해놓곤, 전화 끊고 30분 뒤에 언니 매니저가 집으로 CD 한장을 들고 오셨어요. 음악 듣고 기분 풀라고. (웃음)

“힘들다고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고현정_배우로서 배두나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분명 외로울 텐데 외로운 티를 안 내고 힘든데 힘든 티를 안 내서예요. 힘들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도 없지만 필모그래피를 보면 굵직굵직한 행보만 봐도 힘들고 외로울 거라는 걸 다 알겠거든. 보통은 캐릭터 하나 어렵게 얻으면 웬만해선 그걸 도루묵 만드는 선택은 안 하잖아요? 일일극에서 주말극, 또 미니시리즈 거쳐서 봉준호 감독과 영화 찍기까지가 참 힘든 코스인데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기도 하고.

배두나_힘들다고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다들 힘들게 사니까. 나 정도면 가진 것에 비해 굉장히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란다스의 개>도 오디션장에서 졸고 있는 저를 보고 봉준호 감독님이 “얘가 현남이구나” 싶어서 캐스팅하셨는데 그거 하나로도 세상 고마워하며 살아야죠. 연기도 열심히 한 티내는 게 싫어요. 열연하면 배두나 연기 잘한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만 관객 입장에서 보면 배우가 연기는 잘하는데 그 캐릭터가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저는 저대로 언니가 예능프로그램(<GoShow>) 하신다는 소식 듣고 좋았어요. 누가 봐도 그즈음에 해야 하는 일을 하고 그게 수순이면 매력을 못 느끼는데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니까 멋있어 보여요.

고현정_<코리아>에 배두나씨가 출연한 느낌도 비슷해요. 영화를 아직 못 봐서 조심스럽지만, 선악이 분명하고 감동을 주고 보는 이를 단합시키는 영화일 거라는 인상을 주는 제목이잖아요? 언뜻 배두나라는 배우가 반드시 해야 할 영화였을까 의아하기도 하면서도 이런 유형의 영화가 가진 미덕과 오락성 외에도 배두나가 했다는 점 때문에 영화적으로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관심이 생기는 거지.

배두나_리분희 역은 처음부터 저한테 들어온 게 아니라 많은 여배우들이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제가 필요하다고 고집하신 면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도 해볼 만한 부분이 있었고요. 처음 읽었을 때 첫 대사부터 이해가 안됐어요.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현정화 선수가 은메달, 리분희 선수가 동메달을 땄는데 시상대에 올라가면서 그녀가 괜히 한마디 던져요. “그렇게 죽을 거같이 치더니 은메달이가?” 왜 분희가 그런 말을 했지? 분명 죽일 듯 게임을 해놓고 그런 말을 던지면 대결구도도 깨지고 카리스마 없어 보이잖아? 그러다가 리분희는 다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깨달았어요. 적이고 우리 편이고를 초월해 다 품지만 표현은 안 하는 인물. 후배 순복 선수(한예리)한테는 “앞으로 해외경기 나가다보면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겠지만 눈에만 담고 마음엔 담지 말라” 하는 충고를 하는데 그걸 읽고 알았어요, 아아, 리분희 선수가 마음에 담았구나. 그런데 막상 찍으면서는 가끔 섭섭한 순간도 있었어요. 현정화와 리분희가 대화하는 신에서 지원 언니는 두번 만에 오케이가 나는데 나는 열두번을 가.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신 거지. (웃음)

고현정_아마 처음에는 배두나라는 배우의 감수성이 좋아서 선택했지만, 이 영화에선 그게 아니라 좀더 진하게 해달라거나 다른 걸 바라게 되어서 오케이가 안 나는 거겠지. 이런 걸 못할 애인 줄 알면서 캐스팅해 놓고는 맞추려고 하는 면이 생긴다고 할까.

배두나_저도 좀 고집을 부렸어요. 열두번을 간 것 자체가 세 번째 테이크쯤에서 고쳐서 하려면 할 수 있었는데 고집한 거니까 나도 못됐죠. 하하. 전 스탭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영화를 찍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열두번 NG를 내면 반사판 든 스탭 입에서 한숨이 새나와요. 나도 그 상황이 싫고 부끄럽고 그들에게 자부심 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데 안되니까 힘들어.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감독 정재은, 2001)를 찍을 때 느낀 게 있어요. 10여년 전에는 여성감독이 별로 없었고 거칠게 말하면 스탭들이 아주 순순히 감독을 따르진 않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고집으로 제압을 했어요. 의견이 안 맞으면 세 시간을 서로 버티면서 그 추운데 촬영을 안 하는 거야. (웃음) 그렇게 힘들게 찍었는데 영화가 잘 나오니까 스탭들이 그 감독님을 다 인정하는 거예요. 거기서 배워서 내가 지금은 힘들게 열두번을 가도 나중에 영화가 잘 나오면 수긍해주겠지라는 믿음 하나로 지탱했는데 외롭긴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동료 배우들도 현장에서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예를 들어 난 투숏에서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옆에서 튀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이 보여야 하니까. 그러다보니 내 연기가 전부 심심했나봐. 시사 뒤에 함께 촬영했던 배우들이 “배두나의 힘을 봤다”고 해서 “현장에서 그대로 하는 거 보셨잖아요?” 하니까 그땐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고현정_가만히 있는 연기가 더 힘들어. 뭐든 하는 게 더 편하지. 사람이니까 그날 하루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을 안고 개운하게 퇴근하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가 이야기하는 동안 뭘 그리 많은 표현을 하겠어요? 제3자 시각에서 보면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걸 냉정히 판단해서 카메라와 스탭들 다 있는 현장에서도 견지하는 배우는 보기 드물어요. 현장에서 열심히 하면 적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타협하는 내 자신이 싫을 때가 있어. 열심히 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지.

고현정_두나씨 작품은 볼 때마다 의외예요. <린다 린다 린다>와 <공기인형>을 보고는 그런 쪽으로 갈 거 같았는데 드라마 <공부의 신>과 <글로리아>를 했죠. 베를린에서 워쇼스키 감독과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는다더니 남북한 탁구영화를 찍었잖아.

배두나_실은 그동안 제가 마음이 좀 힘들었어요. <괴물> 이전부터 내가 영화계와도, 대중과도 잘 안 맞는다는 고민을 했어요.

고현정_배두나가 이러리라고 누가 알겠어요?

배두나_<괴물>은 성공했지만 그건 제가 흥행을 했다기보다 줄을 잘 선 것이고(웃음), 드라마를 하면 대중과 소통이 잘되는데 영화는 좋은 감독님들이 노출 연기를 원하시면 노출 연기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는데도 투자자가 꺼리는 배우가 되고 흥행 참패 딱지가 돌아오니 참 싫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는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연기를 안 하면 감이 죽을 테니 연기는 해야겠다고 판단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즈음 <공부의 신> <글로리아>(이상 2010)를 했죠.

고현정_<글로리아>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몰라. 거기서 두나씨가 연기한 인물이 지고지순한 역도 아니고 무대에서 노래도 부르고 온갖 걸 다 하는데, 드라마 현장은 사실 좌판 펼치듯 벌여놓고 갑자기 연기를 해야 하는 민망한 경우도 많고 연기의 뚜렷한 명분을 세워주거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상황이 아닐 때가 많은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영화만 하던 친구가 어떨까, 톤이 다 다른 연기자들과 한꺼번에 주고받으면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봤죠.

배두나_장르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 상황이 빡빡하다보니 드라마를 할 때는 공들이지 못하고 일상적으로 찍게 되는 상황이 힘들었어요. 걸어야 하는 신도 서서 찍자고 하고. 야외촬영이 자꾸 없어지기에 왜냐고 물었더니 배우들이 야외를 싫어하고 세트도 하루로 몰아주는 걸 선호한대요. 그래서 그럼 나라도 하겠다고 상대역 배우와 미친 듯이 찍은 기억이 나요. (웃음) 내가 열정을 보인다고 다 받아줄 만큼 세상이 녹록한 것이 아닌데 매번 같은 걸 느끼고 화내기를 반복하는 제가 바보스럽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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