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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20대 개새끼론’에 고함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2-06-07

총선이 끝난 새벽, SNS을 비롯한 인터넷 바다에 “20대 개새끼론”이라는 쓰나미가 삽시간에 몰려왔다. 20대 여성 투표율이 8%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문도 삐라처럼 도처에 날렸다. 야권이 선거에 패배한 건 20대 개새끼들 때문이다, 비분강개한 야권 지지자들의 성토와 비난이 그 새벽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리고 며칠 뒤, 출구조사를 통해 20대 서울 투표율이 60%를 넘는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고 서울에서 야권이 승리한 건 20대들 때문이라며 찬양하기 시작했다.

타깃 사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여성단체였다. 장자연 사건에는 침묵을 지키던 여성단체들이 김용민 후보와 나꼼수를 헐뜯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다. 그럴 시간에 김형태 당선자나 비판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여성단체들은 장자연 사건 때도 시위를 했고, 오늘도 새누리당 앞에서 김형태 제명 시위를 하고 있다. 단지 그들은 애초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그 간단한 검색조차 귀찮아했을 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입만 열면 상식과 정의를 부르짖는 우리의 진보 꼰대 제현들께선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졌을까? 사실 이 해프닝은 선거에 패배한 야권의 정치적 태도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느라 입만 벌린 채 반이명박주의를 밤낮으로 외쳤던 야권 연대는 이미 패배를 안고 있었다. 대중은 자기 성찰도 보이지 않고, 비전도 없는 정권 심판이라는 허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야권과 그 지지자들은 여전히 사태가 어떤 지경인지 한뼘의 눈치도 없어 보인다. 개중 일부는 온갖 음모론과 책임론의 오타쿠로 변해가고 있다. 20대 개새끼론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아마겟돈으로 파악하는 반이명박주의는 흠결이 있어도 자기 진영이면 쉽게 죄를 사하는 ‘후천적 반성 결핍증’을 앓고 있다. 성찰이 없다 보니, 왜 패배했는가, 왜 대중을 감화시키지 못했는지에 대한 사후 판단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시계가 멈춰 있으니 비전이 나올 리 있겠는가. 상징적 복수에 눈이 어두워 자기반성을 곱씹을 줄 모르는 꼰대 정치는 이렇게 특정 타자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구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통렬하게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정치와 진보라는 게 무엇인지 자기 삶과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명박 이후’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진보는 자기 성찰에서 발아한다. 반성할 줄 모르는 보수들과 이렇게 다를 바 없다면, 미안하지만 다음 대통령도 보수가 접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미안하지만, 반성없는 당신들 중 한명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세상은 단 1인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복수심은 결코 희망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