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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웨스턴’ <철암계곡의 혈투>

복수할 대상의 신상을 적은 노트를 들고 한 남자가 출소한다. 가죽 재킷을 걸치고 웨스턴 부츠를 신은 그 남자는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작두’를 찾아간다. 일명 ‘작두’, ‘도끼’, ‘귀면’이 주인공 철기(이무생)가 복수할 상대들이다. 2011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선보였던 <철암계곡의 혈투>는 제목처럼 유혈이 낭자한 영화다. ‘강원도 웨스턴’이라 이름 붙은 이 영화를 만든 지하진 감독은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웨스턴 장르를 재현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을 선택했다. 가족을 잃은 한 남자의 처절한 복수극, 이런 건 이야기 전개를 위한 기본 설정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철기의 가슴 아픈 사연도 조금씩 드러나고 탄광 개발을 위한 음모도 밝혀지지만 사실 줄거리는 예상 가능하기에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일이다. 영화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웨스턴 장르를 한국적으로 전유한 만주 웨스턴이 이미 1960년대 있었지만 한국 영화사에서 웨스턴은 익숙하지 않다. 만주 벌판이 아니라면, 모뉴먼트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강원도 철암계곡에다 암자를 배경으로 설정한 이 영화는 고전적 웨스턴의 정서와 스타일을 제대로 살리고 있으면서도 토속적이다.

메스와 손도끼는 기본이고 엽총에 골프채까지 살상용 무기는 총동원되고 살해 방식은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할리우드 고전 웨스턴은 물론이고 1960년대 한국 액션영화와 로드리게즈 영화 목록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덤불숲에서 동자승을 사냥감처럼 쫓아가는 장면은 카를로스 사우라의 <사냥>(1966)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결국 <철암계곡의 혈투>를 보는 것은 장르영화의 쾌감을 맛보며 동류의 영화들을 기억에서 재생시키는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다. 철기는 웨스턴의 반영웅들이 늘 그렇듯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서 고독하다. 그가 복수를 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지만 인과관계보다는 애초에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다. 잔인하게 살인을 해도 우수에 젖은 그의 눈빛을 보는 관객은 그의 죄를 묻지 않게 된다. 작두, 도끼, 귀면은 애초에 악인으로 탄생된 인물들이기에 그들에게 후회나 자비 같은 것을 바라면 안된다. 웨스턴에서 익히 본 듯한 태연(최지은)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변화도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어딘지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남자 인물들 사이에 살짝 끼어드는 그녀는 사실 영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와 인물로 빚어내지만 그 안에 감독의 색깔이 배어들 틈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윤상화, 조영진, 곽자형, 지대한, 오용 등 출연배우들의 연기도 거기에 일조한다. <철암계곡의 혈투>는 소멸하는 장르란 없고 장르의 해석은 무궁무진하다는 걸 보여준다. 기꺼이 피를 볼 준비가 되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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