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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미안해, 한강
김선우 일러스트레이션 이한나(일러스트레이션) 2012-08-27

한강 물빛이 이상했다. 하긴, 한강에서 ‘물빛’ 타령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20여년 전 내가 한강을 처음 보았을 때에도 살아 있는 ‘강물의 빛’ 같은 건 없었다. 뭐랄까, 강이 어떤 것인지 아는 나 같은 촌뜨기의 눈에 그것은 ‘강’이라고 하기에 명백히 어불성설인, 일종의 운하나 수로 혹은 수곽에 가둔 더러운 물 창고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강변에서 데이트와 산책을 즐겼고 청년들은 젊음을 발산하며 위로받았다. 그런 풍경이 눈물나게 짠했다. 죽어가는 강이라 해도 아무튼 거기, ‘강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렇게 위로를 받는구나.

그런데 말이다. 예전에 서울시가 편찬한 <한강의 어제와 오늘> 이라는 책을 보고 정말이지 ‘깜놀’한 적이 있다. ‘아, 본래의 한강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강이었단 말이야?!’ 정말 놀랐고, 한강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진경산수화로 이름 높은 겸재 정선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 그리고 또 그려도 늘 새롭다고 예찬한 한강의 모습들. 한강은 굽이굽이 그 흐름이 정말 아름다운 강이었다. 겸재가 그린 ‘송파’ ‘광진’ ‘압구정’ 같은 그림들의 유려한 생동감과 곡선의 향연을 들여다보다가 칙칙한 회색 콘크리트로 처발라진 직선의 방죽, 아파트들, 담장과 벽들이 떠오르면 섬뜩했다. 개발이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면, 가장 좋은 방식의 개발을 고민해야 했을 텐데, 서울 한강변은 ‘흉측한 개발’의 최악의 사태가 몽땅 모여 있는 엑스포장 같다. 멀리 조선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한강은 지금 모습 같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빛’이 살아 있고 금모래가 살랑이는 ‘살아 있는 강’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한강은 저 거무튀튀한 수로 속에 갇혀 죽어가기 시작했나. ‘한강종합개발’로 토건재벌의 위용을 떨치며 한강을 저토록 흉측하게 파괴해버린 주범 중 현대건설은 단연 톱이다. 현대건설과 함께 ‘인생역전’을 이룩한 MB가 건설사 사장에서 서울시장이 되고, 청계천 ‘복원’의 자화자찬가를 부를 때, 그 청계천을 보고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헐! 저 수곽을 ‘천’이라 부르는 것이 용납된다면, ‘강’ 혹은 ‘천’이라는 말에 대한 사전의 용어풀이 및 자연과학적 정의가 완전히 뒤바뀌어야 할 판 아닌가.

‘한강 죽이기’로 소위 ‘성공가도’의 기반을 다진 분이 결국 ‘사대강 죽이기’로 온 나라 강들을 토막 쳐놓을 때, 최근의 ‘녹차 라테 강’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강이 왜 저렇게 되는 거지? 학자들은 어려운 말로 설명하겠지만, 나 같은 글쟁이는 직관적으로 그냥 이런 말이 나온다. “흐르지 못하니까!” 흐르는 것이 강이다. 흐름이 끊기고 고이면 물은 썩기 마련이다. 전국의 강들을 토막토막 절단하고 콘크리트 보로 가두어 물 흐름을 죄다 끊어놓고서 강이 정상이길 바란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누군가가 ‘가카는 녹조 스똬일’이란다. 쿡, 웃음이 나오다가도,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손해배상받을 수 있는 법 좀 만들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