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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이돌, 아니 아이들에게
이효리(가수)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2-09-03

우리는 아이돌 공화국에 살고 있다. 1세대 아이돌 핑클의 리더 출신인 나조차도 이름과 얼굴을 매치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아이돌 그룹이 쏟아지듯 나온다. 요즘 아이돌은 내가 활동하던 때와 달리 영화, 드라마, 예능,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게다가 K-POP 열풍으로 전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나로서는 이게 기쁘기도 하지만 속사정을 알고 있는 탓에 안쓰럽기도 하다. 분신술을 쓰는게 아니라면 그들의 스케줄은 살인적일 것이다. 얼마 전 만난 한 아이돌 후배 말로는 아시아권은 당일치기로 갔다온단다. 하루에 두세 국가를 다니기도 하고, 유럽이나 미국처럼 먼 나라도 1박2일이나 2박3일로 후딱 다녀와야 한단다. 맙소사. 인기도, 돈도 좋지만 그 스케줄을 대체 어떻게 지탱할 수 있는 걸까. 그 이야기를 해준 아이돌 후배의 표정도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한국 아이돌의 평균 나이는 21살이다. 대부분이 10대다. 평균 연습 기간은 4∼5년이다. 이들은 친구, 가족과의 시간들을 뒤로한 채 또래 연습생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중 0.001% 정도만이 운좋게 데뷔에 성공한다. 성공한 뒤에는 더 치열한 경쟁을 시작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팀은 소속사에서 만들어준다. 운이 좋으면 맘이 맞는 친구를 만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자신의 취향이 아닌 사람과 24시간 함께해야 한다. 내가 활동할 당시엔 다행히도(정말 다행히도!) 숙소가 없었다. 요즘 아이돌들은 숙소 생활을 하는 탓에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도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평균 수면시간이 2∼3시간이라면…. 사랑하는 부부도 그런 상황에 놓이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칼로 물 좀 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음악적 색깔도 소속사에서 정해준다. 출연하는 방송, 입는 옷, 말하는 것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입지를 굳힌 팀들은 어느 정도 선택권이 주어지겠지만 대부분은 자기와 맞지 않아도 시키는 대로 참고 할 수밖에 없다. 가끔 후배 아이돌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제일 힘든 건 사생활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일이 끝나도 매니저의 감시로 숙소 밖을 나가기가 어렵다. 어렵게 숙소 밖을 나가도 사람들의 눈 때문에 갈 곳이 별로 없다. 그들은 여러 스트레스를 안으로 쌓아가고 있다.

아이돌은 그저 청년들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둘 다 감당할 준비가 안된 어린 10대들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스타들이지만 아직 숙성할 시간이 필요한 보통의 청년들이다. 이렇게 어린 친구들이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덜 성숙한 나이에 학교와 친구와 부모와 떨어져 최소한의 개인생활도 보장받지 못한 채 꿈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달리고 있다. 많은 기획사들은 아이들에게 춤과 노래, 연기 등 스펙을 쌓아주려고 열중한다. 그런데 사회와 떨어져 생활하는 이 친구들의 인성교육은 누가 담당하고 있는 걸까? 이 친구들이 아이돌로 성공하지 못할 경우 사회로 다시 돌아가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장치는 마련되어 있는 걸까? 눈앞의 돈을 위해 아이들의 스케줄을 마구 돌리기보다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장기적으로 보자면 그건 아이돌뿐 아니라 기획사에도 훨씬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올해는 아이돌과 관련된 사건과 사고가 잇따라 터져나온다. 사람들의 질타가 쏟아진다. 포털 사이트에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계속 올라온다. 그 밑으로는 말로 옮기지 못할 댓글들이 달린다. 아이돌 개개인의 도덕성에 잣대를 들이댈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돌 선배인 나로서는 그들의 진짜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고 싶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돌의 외양 속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효리의 ‘디스토피아로부터’는 이번주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