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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삐걱거림 <엘르>
윤혜지 2012-10-10

부족함 없는 그녀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듯 안느(줄리엣 비노쉬)의 집은 그저 하얗다. 하지만 그 완벽한 공간에서 안느는 보이지 않는 긴장으로 늘 스스로를 조이며 산다. 프랑스 엘르 매거진의 에디터로 일하는 안느는 취재차 두명의 여대생 샬롯(아나이스 드무스티어)과 알리샤(조안나 쿠릭)를 만나게 된다. 학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를 시작한 그녀들의 얘길 들으며 안느는 일상의 이름으로 그동안 감춰두었던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다.

폴란드 출신의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은 스물다섯살에 만든 데뷔작 <행복한 남자>로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이어 선댄스영화제 감독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루키다. 각본에 참여한 티네 비르켈은 철학과 심리분석학을 전공했고 덴마크 일간지 <인포메이션>의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프랑스에서 시나리오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영화에서 여대생들이 성매매를 하는 이유를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노렸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영화 속 세 여자는 어쩐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정투쟁 혹은 젠더간의 권력다툼에서 지고 만 패잔병에 더 가까워 보인다.

두 여대생을 만난 뒤에야 안느는 자신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삐걱거림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곧 그 삐걱거림의 원흉인 아들과 남편에게서 비로소 무자비한 남성 권력을 체감한다.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마다 안느는 상처를 입는다. 글을 풀어내는, 숨겨둔 욕망과 권력을 고발하는 그녀의 손은 화상을 입고 피를 품는다. 그리고 안느와 샬롯과 알리샤는 이제 한 사람이 된다. 안느는 어느 순간부터 두 여대생을 향하던 질문의 방향을 자기 안으로 돌린다. 유명 매거진의 에디터로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럴듯하게 살아온 이 삶은 과연 행복했는가. 그러나 안느가 정성을 다해 만들고 지켜온 가정은 정작 그녀에게 어떠한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바싹 마른 그녀의 일상에 다시 생의 욕망을 찾아준 존재는 샬롯과 얄리샤다. 집에선 건조한 시리얼 따위를 씹으며 빨래를 돌리던 안느가 알리샤와 함께 있을 때면 입안에 든 음식이 다 튀어나오도록 쾌활하게 웃거나,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안느의 고민은 사뭇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남성들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을까. 삶의 방식을 ‘선택’해 만족스레 살아가면서도 결국 ‘비밀’을 안고 사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보편적인 약자의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안느의 좌절은 필연적이다. 한껏 드레스업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한없는 위태로움도,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세 여자에게서 들리는 남모를 한숨도 모두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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