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힐링팔이들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3-01-14

엊그제 지방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상경한 27살 청년을 우연히 만났다. 혈혈단신 상경했단다. 영화를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고 물었다. “포기하세요.”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집안이 넉넉해요? 아마 가난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혹자는 그렇게 단칼로 베어내듯 상처준 것을 나무라며 독려와 위로를 하지 못한 것을 책망했다. 시쳇말로 멘토짓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난 멘토라는 말을 경멸한다. 요즘 지천에 널린 그 멘토들이야말로 삶의 내밀한 속살을 감추는 꼭두각시 인형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멘토라는 작자들은 그 자신 성공한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며 후배들에게 ‘넌 할 수 있다’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겠지만, 그 순간, 이 사회의 야만적인 정글의 법칙은 미싱처럼 여전히 잘만 돌아가기 때문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멘토들이 쏟아내는 그 수많은 긍정의 언어들과 값싼 독려의 말들은 성공신화를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를 위한 윤활유와도 같다.

‘멘토’와 짝을 이루는 게 지난해 가장 유행한 ‘힐링’이 되겠다. 멘토들은 정글의 법칙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반면, 자칭 ‘힐링 닥터’들은 이 야만적인 경쟁사회에서 지치고 다친 청춘들을 향해 너의 내면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속삭인다. 너는 지금 청춘이기 때문에 아프고, 너는 지금 마음이 약해져서 아프다는 것이다.

과잉으로 넘쳐나는 이 힐링의 언어들은 흡사 항우울제와 닮아 있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시장을 조성하고 있는 항우울제는 경쟁사회에서 도태되고, 공동체 붕괴를 통해 정체성을 상실하고 외로움을 겪는 도시인들의 병든 영혼을 위한 유일한 치유제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항우울제는 사회적 변화를 통해 근원적으로 치유되어야 할 문제를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려놓고, 다시 한번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효과적 상품이다.

말하자면, ‘힐링팔이들’. 피로한 삶의 근본적 원인을 성찰하거나 그 삶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위로의 수사들과 긍정의 언어들로 그 피로한 삶의 원인과 그 대책을 흐리게 만드는 사람들. 온통 피로에 휩싸여 있지만, 다시금 긍정의 언어들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우리 사회의 가련한 시시포스들은 항우울제를 입에 털어넣듯, 힐링 상품들을 소비하며, 다시 한번 바위를 끌고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시대, 맞다. 하지만 위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처의 원인을 온전히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한 최선의 치유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멘토나 힐링 따위가 아니라 병든 사회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칼날 같은 말들, 그 불편한 부정의 말들을 삶의 권리로 상승시키는 자각의 순간들이다.

그 영화지망생 청년에게 가난과 꿈이 거래되는 야만적인 현실을 귀띔해주긴 했지만, 묵묵히 그 청년이 꿈을 펼치며 도움을 요청한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도울 것이다. 공허한 멘토질이 아니라, 각성한 가난뱅이들의 연대가 이 광포한 시절을 견뎌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