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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그의 적들` 뿐인 할리우드 전쟁영화
2002-02-01

할리우드가 즐겨 생산해내는 전쟁영화나 액션영화를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가 많다. 볼거리를 위해 미국 바깥의 세계를 일쑤 ‘소품’이나 ‘장식’으로 써먹는 태도가 눈에 걸리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국내 극장가에 간판이 내걸리거나 걸릴 예정인 작품만 꼽더라도 <에너미 라인스>와 <콜래트럴 데미지>, <블랙 호크 다운> 등이 그런 예이다.<에너미 라인스>는 보스니아 내전, <블랙 호크 다운>은 소말리아 내란에 말려든 미군에 관한 영화이고, <콜래트럴 데미지>는 콜롬비아 반군의 테러를 소재로 삼은 영웅활극이다. 이런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타인`에 대한 탐구가 전무하거나 지극히 빈약하다. 영화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나 사태,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는, `방약무인적 타인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 만든 것 같다. 거기엔 그저 `미군(미국)`과 `그의 적들`이 있을 뿐이다. 가령 <에너미 라인스>가 그려낸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은 어떤 세력과 어떤 세력이 충돌하고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콜래트럴 데미지>같은 활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영화에서 콜롬비아 좌익 반군이란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그리하여 영웅의 활극 상대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테러기계`일 뿐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은 좀 억울할지 모른다. 영화는 기근과 내란으로 30만명이 죽어간 소말리아에 주둔하던 미군이 치른 1993년 10월3일의 전투상황이 내용의 전부다. 유엔 구호물자를 갈취해온 `악독한` 민병대장 아이디드의 두 측근을 체포하기 위해 모가디슈 시내 한복판으로 미군 특전대와 델타포스가 진입한다. 1시간으로 예상한 `간단한` 작전은 민병대의 거센 저항으로 18시간의 사투로 돌변한다. 결과는 미군 19명의 전사와 소말리아인 1천여명의 사상이었다. 영화는 이 작전에서 전사한 미군 19명의 계급과 명단이 올라가며 끝난다. 이 작품이 전쟁이라는 이름의 악몽을 사실적으로 해부한 걸작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지 않다.그러나 여기서도 `타인`에 대한 탐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9명의 미군 전사자는 분명 전쟁의 비극을 상징한다. 그런데 세계 최강부대에 희생당한 최약소국 소말리아인 1천여명은 누가 기억하지? 남의 나라 시장 한 복판에 소풍가듯 중무장 헬기를 몰고 들어갔던 강자의 무관심이 어쩌면 이렇게 영화를 만든 이의 머리에 그대로 복제되어 있는 걸까. 전쟁도 끔찍한 일이지만, 어쩌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연습조차 해본 적이 없는 자기중심주의가 더 끔찍한 건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그런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일쑤 극한으로 치닫기 때문이다.이상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