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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회 <안나 카레니나>
장영엽 2013-03-20

오직 사랑만을 위해 모든 걸 던지는 비련의 여인. 영국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여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19세기 러시아 상류계층의 여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캐스팅부터 상영 언어, 로케이션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의 조 라이트가 <안나 카레니나>의 연출을 맡으며 직면했던 문제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제작비 3천만파운드를 두고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했다 취소하기를 여러 번, 결국 조 라이트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촬영을 세달 앞두고 <안나 카레니나>의 주요 배경을 극장으로 바꾼 것이다(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런던 근교의 셰퍼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조 라이트의 이 대담한 시도는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보는 이가 되새겨볼 새도 없이 숨가쁘게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내리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극중극을 연기하는 양 무대에 선다. 여기에 영화적인 영상이 무대 위로 교차편집되며 <안나 카레니나>는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형식은 영화가 안고 있던 몇 가지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한다. 관객은 러시아인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어색함과 19세기 러시아 사교계의 재현에 대한 의문을 품고 마음 졸이며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영화의 형식을 빌린 한편의 연극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 라이트는 톨스토이의 풍부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개성을 십분 살려 연극과 영화가 우아하게 결합된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다.

영화는 오빠(매튜 맥퍼딘)의 외도로 상심한 새언니(켈리 맥도널드)를 달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안나(키라 나이틀리)의 여정으로 시작한다. 안나는 그곳에서 새언니의 동생 키티(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약혼자 브론스키(애런 존슨)를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힌다. 러시아 정치계의 스타 카레닌(주드 로)과의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안나는 그날 이후 오직 브론스키와의 사랑에 집중하지만,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점차 외톨이가 되어간다.

<안나 카레니나>의 미덕은 무대를 빌려 배경의 활용폭을 넓힌 다음, 정말로 담고 싶은 정서들을 영화적 요소를 활용해 채운다는 점에 있다. 조 라이트는 이미 잘 알려질 대로 알려진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간의 위험하고도 절절한 사랑에 집중하는 대신,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며 개인을 파멸의 길로 내모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안나 카레니나>가 몇몇 주요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사를 듣지 않고 보아도 될 영화라는 것이다. 안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인물은 예의와 겉치레로 포장된 필요없는 말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진면모는 카메라가 종으로 횡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시선과 행동을 포착할 때에야 비로소 짐작할 수 있다. 대사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이 영화의 진정한 스토리텔러는 춤과 의상, 그리고 음악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추는 무도회 장면은 <어톤먼트>로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한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드라마틱한 음악과 더불어 그 어떤 정사장면보다 에로틱하게 다가오고, 점점 어둡고 음울하게 변해가는 안나의 옷은 그녀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듯 처연하다. 비슷한 시기에 워킹타이틀이 제작한 ‘송스루’ 형식의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처럼, 최근의 워킹타이틀은 어쩌면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텍스트에 영화적 질료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방식의 실험에 몰두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나 카레니나>가 그 실험을 계속 지지하게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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