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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크루즈] 눈부신 지중해 스타일
주성철 2013-04-25

페넬로페 크루즈

<로마 위드 러브>의 콜걸 안나(페넬로페 크루즈)는 호텔방을 잘못 찾아들어가서 만난 남자 안토니오(알레산드로 티베리)와 신혼부부 행세를 시작한다. 안토니오의 친척 어르신들은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려왔을까?’라는 표정을 짓지만, 안나는 주변의 시선이 어떻건 간에 당당하고 쾌활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기술’을 안토니오에게 가르쳐준다. 그저 흔한 콜걸의 에피소드지만, 페넬로페 크루즈의 존재감은 우디 앨런이 상상하는 ‘로마 드림’의 한 조각을 멋지게 맞춘다. 영국 출신을 제외한(아니, 그를 포함하더라도) 유럽 여배우의 활약상을 살펴볼 때, 과연 페넬로페 크루즈만 한 이가 있을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유럽 아트필름을 자유로이 오가는 가장 발랄하고 아름다운 아마조네스와의 만남.

<로마 위드 러브>를 <로마의 휴일>(1953)의 이상한 변형이라고 본다면, 페넬로페 크루즈는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실제로 페넬로페 크루즈는 종종 오드리 헵번과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에서 여배우의 꿈을 이룬 레나(페넬로페 크루즈)가 촬영현장에 마치 <사브리나> (1954)의 그녀처럼 꾸미고 나타나자, 감독과 스탭들은 일제히 “완전히 오드리야!”라며 감탄했었다. 실제로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코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면 딱 오드리 헵번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로마의 휴일>의 공주가 <로마 위드 러브>에서는 콜걸로 등장한 셈이니, 마냥 유머러스하고 로맨틱해 보이는 이 영화에서 역시 우디 앨런의 괴팍한 심술은 여전한 것 같다.

우연히 만난 신사(그레고리 펙)의 도움으로 로마 곳곳을 누비며 서민의 생활을 즐겼던 앤 공주(오드리 헵번)처럼, 콜걸 안나 역시 평소 누려보지 못했을 법한 한낮의 자유를 만끽한다. 우디 앨런이 생각하는 진짜 로마의 ‘휴일’은 바로 이런 삶이다. 그런데 그녀가 우연히 파티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란 얼핏 고위층으로 보이는 평소 자신의 고객(?)들이다. 이탈리아의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의 섹스 스캔들을 연상시키는 그 장면에서 안나의 표정은 더없이 밝다. 아니 그냥 주변의 남자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가지고 논다. 배우로서 지나치게 생각이 많거나 혹은 적어도 소화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어쩌면 최근 그녀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에너지란 바로 그런 능청스러움인 것 같다.

그런데 1974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난(믿기 힘들지만 어느덧 마흔) 페넬로페 크루즈는 알다시피 스페인을 대표하는 여배우다. 어려서부터 발레를 배우며 배우의 꿈을 키웠고, (어쩌면 지금의 남편 하비에르 바르뎀과의 첫 만남이기도 했던) 비가스 루나의 <하몽하몽>(1992)으로 예기치 않은 유명세를 치렀으며, 꿈에 그리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 <라이브 플래쉬>(1997)를 통해 할리우드의 관심까지 받으면서 쑥쑥 성장했다. 하지만 어쩌다 <로마 위드 러브>의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마치 이탈리아 출신 배우인 양 등장하게 된 걸까.

곰곰이 따져보면 그녀는 이탈리아와 꽤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2006)과 더불어 그녀의 배우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 바로 이탈리아의 배우 겸 감독 세르지오 카스텔리토의 <빨간 구두> (2004)에서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사는 알바니아 출신 여성으로 등장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원시적 향기가 물씬 배어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전에 보여준 마냥 아름답고 섹시한 포장을 벗고 배우로서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녀를 ‘톰 크루즈의 여자친구’로 각인시켰던 <바닐라 스카이>(2001)를 비롯해 <코렐리의 만돌린>(2001)과 <러브 인 클라우즈> (2004) 등 소모적인 할리우드 활동에 매진하다 결국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실제로 <귀향>에서 그녀와 함께한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녀를 향해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1945), 장 르누아르의 <황금마차>(1952),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맘마 로마>(1962) 등에 출연하고 버트 랭커스터와 호흡을 맞춘 <장미 문신>(1955)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전설의 이탈리아 배우 안나 마냐니와 비교하기도 했다. “기가 센 여자가 나와 고함부터 치는 이탈리아영화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녀에게서 바로 머리가 흐트러진 채 항상 소리치는 이탈리아 여자의 모습을 봤다. <귀향>의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는 안나 마냐니처럼 모성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며, 지치고 힘든 가운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가는 강인한 여자”라는 게 그의 얘기였다. 덧붙여 “그녀는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아닌 ‘지중해 스타일’ 배우”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녀와 함께할 때면, 그녀를 평범하고 친근하게끔 못생겨 보이도록 만드는 게 가장 힘들다”고도 말했다. 그런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유래한 듯한 에너지는, 우디 앨런과 함께했던 전작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9)의 종잡을 수 없는 마리아 엘레나(페넬로페 크루즈)에게도 깊이 반영돼 있다.

이제 페넬로페 크루즈는 <섹스 앤 더 시티2> (2010), <캐리비안의 해적4: 낯선 조류>(2011) 등에 별다른 존재감 없이 등장하고 <로마 위드 러브>에 적은 분량으로 출연할지라도 그 강렬한 인상을 놓아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구상 몇 안되는 배우들이 지닌, 특정 장르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초월적 카리스마에 성큼 다가섰다고나 할까. 최근의 자유로운 행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언제나 믿어왔다. 늘 내 기대보다 더 많은 걸 얻었다.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일하면서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의 창의력을 발전시키는 것, 그런 기회가 흔치 않고 또 힘도 들겠지만 배우로서 그런 충만함을 느끼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자신감과 여유 때문인지 앞으로 찾아올 영화들이 더욱 기대된다. 아니, 그와 별개로 기대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다. 다시 세르지오 카스텔리토와 만난 <인투 더 월드>, 브래드 피트와 마이클 파스벤더와 호흡을 맞춘 리들리 스콧의 <카운슬러>, 그리고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오랜만에 조우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스탠바이 러버스>다. 각각 이탈리아와 할리우드와 스페인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 그렇게 페넬로페 크루즈의 여행은 계속된다.

magic hour

알모도바르가 말하는 크루즈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귀향> DVD 코멘터리를 녹음하면서 이례적으로 ‘라이문다’를 연기한 주연배우 페넬로페 크루즈를 그 자리에 초대했다. “어려서부터 겪어온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로, 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야말로 나에게 있어 픽션의 원천”이라며 <귀향>의 자전적 성격에 대해 말했던 그가 ‘어머니’로 모신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셈이다. 그가 말하길 <귀향>의 페넬로페 크루즈는 ‘약삭빠르고 대담하며 거침없는’ 라이문다를 너무나 노련하게 소화해냈다. 그렇게 <귀향>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특히 그는 그녀가 이모 집에 찾아가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다 같이 먹고 있는 도넛에서 설탕이 떨어지는지 몰랐는데, 그녀가 그런 부스러기들을 진짜 영화 속 라이문다가 된 것처럼 씩씩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두손을 치켜들었다. “동작의 디테일에 대해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손으로 직접 능숙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당신이 진짜 훌륭한 배우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고 말하며, 길게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몰입한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라이문다는 모든 걸 자기 혼자 알아서 하는 여자잖아요. 저한테 원한 게 그거 아닌가요? 당연히 그래야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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