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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한국형 멜로에 대륙이 웃고 울다
이주현 2013-05-09

한중 합작 <이별계약> 베이징 프리미어를 가다

한중 합작영화 <이별계약>이 4월12일 중국에서 개봉했다. 개봉 첫주 중국 박스오피스 성적은 1위. 개봉 4일 만에 벌어들인 금액은 7066만위안(약 128억원). 이틀 만에 제작비 3천만위안을 회수했다. CJ E&M이 중국시장을 겨냥해 기획/제작/투자한 첫 영화가 이른바 ‘대박’을 친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인 4월9일, <이별계약> 베이징 프리미어 행사에 참석했다. 영화를 연출한 오기환 감독과 주연배우 펑위옌, 김영찬 CJ E&M 차이나 담당 등을 만나 영화 안팎의 얘기를 들었다.

황사로 누렇게 얼룩져 있을 베이징의 봄을 생각하며 마스크 두어개를 여행가방 속에 챙겨넣었다. 그런데 웬걸. 4월9일 베이징수도공항에 내려 올려다본 하늘은 기대치 않게 청명했다. 악명높은 베이징의 황사를 비껴가다니, 행운이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곧장 <이별계약> 베이징 프리미어 행사가 열리는 CGV베이징올림픽파크점으로 이동했다. 오후 2시30분부터 <이별계약>의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200여개 중국 매체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카메라 기자들의 모습은 서울이나 베이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기자회견엔 오기환 감독과 리싱역의 펑위옌, 마오마오 역의 장진푸, 영화의 주제곡을 부른 상원지에, 의상디자이너 란위가 참석했다. 여주인공 바이바이허는 영화 촬영 때문에 불참했다.

오기환 감독.

TV토크쇼 같은 기자회견이 1시간 넘게 이어졌고, 저녁 7시15분에 <이별계약> 상영이 시작됐다. 상영관 입구에서 영화 관계자들이 펑위옌과 바이바이허의 얼굴이 프린트된 손바닥 크기의 휴지를 나눠주었다. 미처 손수건을 챙기지 못한 최루성 멜로영화 관객을 위한 작은 배려 혹은 세심한 홍보였다. 자리를 찾아 극장에 들어섰다. 중국에선 앞좌석이 상석으로 여겨진다고 했는데, 특별히 배정받은 좌석은 앞에서 두 번째줄이었다. 첫째 줄은 물론 ‘귀빈’들의 차지였다. 귀빈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애초 <이별계약>은 오기환 감독의 데뷔작 <선물>의 리메이크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죽음을 선고받는다는 설정 외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5년 전, 리싱(펑위옌)과 차오차오(바이바이허)는 ‘이별계약서’를 작성한다. 차오차오는 “웨딩드레스 사줄 형편도 안되는” 리싱에게 서로 성공한 뒤 만나자고 이별을 선언한다. 이별을 납득할 수 없는 리싱은 그렇다면 성공할테니 이별의 기한을 정해달라 제안하고, 두 사람은 “5년 뒤에도 둘 다 독신으로 남을 경우 결혼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이별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5년이 흐른 현재. 실력있는 셰프로 성장한 리싱은 차오차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결혼 소식을 거짓으로 알린다.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를 하기 위한 리싱의 계획에 차오차오가 걸려들고, 두 사람은 알콩달콩 사랑의 줄다리기 게임을 벌인다. 그리고 이들이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 차오차오의 위암이 재발한다.

장진푸, 펑위옌(왼쪽부터).

중국 관객을 위한 영화로 부활한 <선물>

<이별계약>에는 온도가 다른 두 장르가 섞여 있다. 전반부는 로맨틱코미디, 후반부는 최루성 멜로다. <이별계약>은 최루성 멜로영화가 거의 없는 중국시장을 겨냥해 기획된 영화다. 하지만 오기환 감독은 “단순히 울리는 영화로는 흥행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의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개인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좋아한다. <시티 라이트>(1931)를 보면 인생이 보이지 않나. 그처럼 웃음과 울음이 공존하는,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초반은 의도적으로 가볍게 띄웠다.” 중요한 건 중국인의 정서를 파악하고, 울음과 웃음의 포인트를 파악하는 거였다. 이를테면 부부싸움을 하면 한국은 여자가 주로 울지만 중국은 남자가 운다는 점, 대륙여인은 쉽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 등 놓치기 쉬운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촬영, 조명, 음악, 편집 등 주요 스탭들을 한국인으로 꾸렸지만 시나리오는 중국인 작가에게 맡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오기환 감독은 영화의 설계는 직접 하되 세부 인테리어는 중국인 작가에게 일임했다. 단적인 예가 차오차오가 자신의 병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내가 피 토하는 장면을 찍게 될 줄이야. (웃음) 정말 미치겠더라. 그래서 여배우와 중국 스탭들한테 이 장면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그런데 다들 괜찮다더라.” 한국인의 정서로는 촌스러울 법한 설정이 중국인들에겐 충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얘기다.

오기환 감독은 “중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중국 영화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한국의 20년 전 영화제작 환경과 비슷했다는 중국의 영화제작 상황을 오기환 감독은 온몸으로 느꼈다. 시나리오 완고도 크랭크인 2주일 전에 겨우 나왔고 촬영일정도 빡빡해 31회차에 촬영을 모두 마쳤다. 근사한 세트에서 욕심을 부려가며 원하는 그림을 찍어내는 건 그야말로 언감생심. 편안한 숙소에서 맛있는 밥을 먹는 작은 사치조차 누릴 수 없었다. “중국에서 찍는 한국영화 현장에 가보면 중국 스탭, 한국 스탭 밥줄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밥줄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스탭도 3위안짜리 도시락을 먹었다. 김과 김치만으로 밥 먹은 셈이다. 어떤 스탭은 촬영 5주 동안 변을 못 봐서 응급실에 실려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기환 감독이 들려준 고생담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고생담을 들려주는 오기환 감독의 얼굴엔 웃음이 만연했다. “한국에서 영화로 저점을 한번 찍지 않았나. 이번에 연출하면서 마음가짐이 많이 변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은 첫 장편영화가 <이별계약>이다.”

<이별계약>은 중국 배우들을 데리고,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중국인이 중국시장을 겨냥해 제작된 영화다. 한중 합작이라고는 하지만 방점은 ‘한국’에 찍히지 않는다. 오기환 감독은 인터뷰 중간중간 “영화가 촌스럽지 않던가요?” 하고 물었다. <이별계약>의 이야기와 정서는 확실히 10년, 20년 전 한국영화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촌스러움이 외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근래에 이런 영화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첫주 박스오피스 성적을 보면, 일단 <이별계약>이 중국인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5, 6월 중에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이별계약>의 개봉이 예정돼 있다. 한국에서는 상반기 중에 <이별계약>을 만날 수 있다.

주연배우 펑위옌은 청춘의 아이콘

아름다운 잔근육을 지닌 몸이 좋은 배우. 자기 관리에 철저한 성실한 배우. 펑위옌에 대한 중국 현지인들의 평가다. 대만 출신의 배우 펑위옌은 최근 3~4년 사이 <러브>(2012), <점프 아쉰>(2011), <청설>(2009) 등을 통해 청춘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점프 아쉰>으로는 2011년 대만 금마장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기환 감독은 그런 펑위옌에게서 소년의 얼굴을 지우고 남자의 모습을 끌어냈다. <이별계약>에서 펑위옌이 연기하는 리싱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로맨틱한 남자다. 펑위옌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다. 비현실적인 캐릭터의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는 배우들의 호연으로 판타지가 아닌 그럴싸한 현실의 연애로 그려진다. 펑위옌 역시 믿음을 가지고 연기를 한 것 같다. “우리는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리싱과 차오차오 같은 사랑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랑이 지나가도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아름답게 남는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로맨스영화에 자주 출연했지만 펑위옌은 액션과 누아르 장르에도 잘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오기환 감독도 언젠가는 펑위옌과 액션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굉장히 세계적인 배우가 될 것 같다”는 오기환 감독의 예감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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