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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표현물] 소녀들의 판타지
이적(가수) 일러스트레이션 아방(일러스트레이터) 2013-07-01

극장 갔다가 우연히 재회한 혜원, 그래서 또 만난 태일 일행과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이야기하다

태일과 연락 않고 2주를 보냈다. 불편한 점이라곤 없었다. 물론 전혀 신경을 안 쓴 건 아니지만. 그날, 우리의 20년 지기 은아와 셋이 <비포 미드나잇>을 본 날, 은아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태일이 내게 노출했던 공격성은, 마치 육식동물이 자기 영역을 침범한 다른 수컷에게 드러내는 송곳니처럼 사나웠다. 무례한 독설엔 이골이 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그가 보여준 본능적인 증오는 좀처럼 견뎌내기 힘든 것이었다. 대체 제 애인 혜원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나. 술 한잔하자는, 영화 한편 같이 보자는 친구 애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 그리도 죽을죄인가. 은아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래전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그게 도대체 태일과 무슨 상관인가. 내가 왜 은아와의 일에 대해 그의 눈치를 보고 변명해야 하는가. 그날 은아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나와 태일 모두 우리의 충돌을 감추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헤헤거릴 수도 없었다. 우린 메마른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다가 각자 핑계를 대며 자리를 정리했다. 은아와의 오랜만의 해후가 그렇게 의미없이 끝나버린 건 모두 태일의 책임이다. 생각보다 이른 귀가라며 돌아서는 은아의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고도 태일은 아마 반성 비슷한 것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2주 동안 난 녹음실을 드나들며 가을에 나올 새 앨범의 음악들을 다듬고, <방송의 적>이라는 페이크 다큐를 촬영했다. 티는 안 나지만 고된 일들이다.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것 같아 혼자 가까운 극장을 찾았다. 멀티플렉스의 반은 <맨 오브 스 틸>, 반은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상영하고 있었다. 장관이라면 장관인 상영시간표였다. 스크린 수가 많아진 게 영화 선택의 다양화와는 무관하단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요즘은 정말 신선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어쨌든 얼마 전 <아이언맨3>를 본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지라 ‘무슨무슨 맨 영화’를 또 보긴 꺼려져,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표를 끊는다. 그리고 입장하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적 오빠 아니세요? 영화 혼자 보세요?” 혜원이다. 그녀 옆, 친구로 보이는 20대 초반 여성이 살짝 뒤로 물러서며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본다. “아… 혜원씨는 여기 웬일이에요? 영화 보러 왔어요?” “저희는 벌써 보고 나가는 길이에요. 김수현 보러 왔지요. 제 친구는 두 번째 본 거예요. 김수현 복근 다시 본다고. 히히. 근데 오빠도 이 영화 보세요? 의외네. 이런 영화 막 씹고 다니실 것 같은 이미진데.” “씹긴요, 껌도 아니고.” “어우, 또 아저씨 같아. 아, 맞다. 좀 이따 태일이 오빠 만날 텐데 같이 보실래요?” “그게 전… 데이트 잘하세요. 영화 볼게요.” 휙 등을 돌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불이 꺼진 극장의 구석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혼자 영화 보는 맛이 이런 것이었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나만의 공간으로 잠입하는 기분. 태초의 자궁으로 숨어드는 기분. 그러면서 갑자기 열린 창을 통해 차원이 다른 세계로 빨려드는 기분. 음, 허세는 그만. 잠이나 들지 않길 바라본다.

영화는 기대보다 재미있었다. 최소한 시계를 기웃거리게 하지 않았다. 바로 작업실로 갈까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고민하며 나오는데 극장 입구에 당찬 표정의 혜원이 아까 그 친구와 함께 서 있었다. “끝날 시간 맞춰서 기다렸어요. 제 친구랑 태일 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두 사람 뒤 멀찍이 태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본다.

우리는 가까운 패밀리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곳, 오랜만이다. 예전처럼 점원들은 외국어 같은 억양으로 어수선히 우리를 맞이했다. 비행기 기내식보다 약간 나은 음식의 질과 무자비한 양도 여전하다.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긴장을 풀지 않던 태일이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피식 웃는다. “영화 어떻게 봤냐, 이적? 난 며칠 전에 봤는데 <7번방의 선물>보다 낫더라. 그땐 천만 넘게 봤다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안 나고 화가 나길래 내가 사이코패슨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니까.” “너답다. 이 영화는 판타지로 보니 재미있던데? 후반에 눈물로 빠지는 건 마케팅팀에서 주문하는 건가? 한국 상업영화 전통인가 봐. 인도영화에 꼭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 나오는 것처럼.” “그보다 김수현 너무 멋있죠? 귀엽고, 섹시하고.” 혜원의 티 없는 감탄에 옆의 친구는 가족 칭찬이라도 듣는 듯 얼굴을 붉힌다. “이소룡 같기도 하고, 아이돌 같기도 하더라고요. 세 주인공이 보이밴드로 보이고, 팬픽같이 약간의 동성애 코드도 있고. H.O.T로 치면 <전사의 후예> 같은 장면이랑 <캔디> 같은 장면이 계속 교차되고.” “H.O.T요? 예로 드는 게 좀 올드하시다.” 혜원의 친구가 웃으며 한마디 한다. 아차. EXO로 할 걸 그랬나. 태일이 고소해하면서 다른 화제로 덮어준다. “외국영화계 애들이 남북분단상황을 부러워한다며. 한국현대사 자체가 엄청난 스펙터클이라고. 하긴 <반지의 제왕>의 모르도르보다 북한이 생생하지. 온갖 상상력을 다 넣고 거기에 현실감까지 줄 수 있으니까. 이 영화 정도면 네 말대로 거의 판타지야. 어떤 애들은 싫어하겠어. ‘거기는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라, 현존하는 위협이라니까!’ 시위하는 거 아니냐.” “야, 겁나. 누가 또 종북영화라고 설레발칠라. 사실 ‘끈 떨어진 간첩’ 얘긴 전혀 새로운 게 아니지. 가깝게는 <베를린>도 비슷한 설정이잖아. 근데 이 영화는 마치 <베를린>에서 소녀들이 거북해할 요소를 모두 빼고, 열광할 요소들만 짜넣은 것 같아. 마지막 옥상장면은 긴 뮤직비디오 같고. 그런 명확한 기획의도를 갖고 만든 영화가 손발이 덜 오그라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정도면 성공한 결과물 아닐까.” “호, 이적, 연예산업 중견 같은 평이네? 이제 아이돌 제작하겠는데?” 태일이 비아냥거리는지 알아채지 못한 혜원의 친구가 반색하며 묻는다. “그럼 김수현이랑도 만난 적 있어요? 혹시 사인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나와 태일의 눈이 다시 마주치고, 우린 웃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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