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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한수 배웠네!

tvN <꽃보다 할배>가 여행과 인생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

tvN <꽃보다 할배>

살면서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일찍 일어나기, 오래 걷기, 낯선 동네 찾아가기. 굳이 변명하자면 저혈압, 평발, 방향치기 때문이고 솔직히 말하면 그저 게을러서일 뿐인 이 모든 태도는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는데, 바로 여행에 대한 귀찮음이다. 게다가 10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유럽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보다 카메라를 누구 가방에 넣느냐, 오늘 점심 때 뭘 먹고 내일은 어디를 구경할까 따위의 사소한 일들로 친구와 끊임없이 신경전을 펼쳤던 부끄러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눈앞의 멋진 풍광에 잠시 감격한 나머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모시고 다시 올게요”라는 엽서를 집으로 보냈던 패기는 수년 뒤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고, 결국 더치페이로 온 가족이 떠난 미국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여행에서 몸이 힘든 건 당연하지만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심신이 다 힘들구나! 왜 아버지는 가이드의 안내를 듣다 말고 휑하니 먼저 가버리실까? 왜 아버지는 양식 먹고 있는데 한식을 찾으실까? 왜 아버지는 항상 저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실까? 왜 아버지는….

그런데 팔순 맏형부터 칠순 막내까지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등 네명의 노배우가 유럽을 배낭여행하는 여정을 담은 tvN <꽃보다 할배>를 보고 알았다. 세상에 우리 아버지만 그러시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장시간 비행에도 지친 기색이라곤 없이 낯선 나라의 기나긴 지하철 통로를 성큼성큼 앞서 가버리는 이순재의 뒷모습에서, 다 같이 먹으려고 트렁크에 담아온 장조림 통이 너무 무거워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백일섭의 찡그린 미간에서 모두 아버지가 보였다. 그리고 “젊었을 땐 호구지책으로 먹고살기 급급해 열심히 일만 했고, 세월이 지나서 가볼 만해지니까 나이가 다 들어버렸다”며, 신구와 박근형이 파리 거리를 걸으며 유럽 여행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 거라고 덤덤히 이야기하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젊어서는 꿈처럼 멀기만 했던 이국땅에 모처럼 오게 되었지만 다음을 기약하지 못해 더 조급한 마음과, 팔다리도 눈도 귀도 예전 같지 않아 답답한 몸 사이의 안타까움을.

비록 ‘걸그룹 멤버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제작진과 매니저의 속임수에 넘어가 합류하긴 했지만 할배들의 여행 가이드 겸 짐꾼이 된 이서진에게 깊은 애처로움과 왠지 모를 고마움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회사로 치면 사장단 네명의 수발을 한꺼번에 드는 대리처럼 괴로운 처지일 텐데도 그는 이 아버지뻘 선배들을 깍듯이 예우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어린아이 같은 면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챙긴다. 아픈 무릎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 하던 백일섭이 모처럼 인력거를 탈 수 있게 되어 얼굴에 화색이 돌자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인력거 기사에게 “개선문까지 아주 천천히 가달라”고 거듭 부탁하는 데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했다. KBS <해피선데이-1박2일>에 이어 <꽃보다 할배>를 연출하는 나영석 PD가 “여행이라는 테마가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든 낯선 환경에 들어가면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난 여행에 대한 기억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그릇을 보여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 H4 중 나의 여행 솔메이트는?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할 수 없이 보는 거지 뭐.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가지요. 아이고, 다리 아파”를 연발하며 출구를 찾던 백일섭.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미술품 앞에서도 “책에서 많이 보던 건데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호방함이라니. 박물관 가면 기념품 가게부터 찾고 여길 나가 뭘 먹을까만 궁리했던 여행객으로선 너무나 친근해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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