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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려버려! 30년 전의 차별도 야유도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13-08-02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다큐멘터리 <그라운드의 이방인>(가제) 주인공들과 함께한 1박2일

1956년부터 1997년까지 41년 동안 매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고국을 찾았다. 그 수가 600여명에 이른다. 그들은 국내 고교 야구팀과 시합도 하고, 일본 야구 기술도 전수하고, 야구 장비도 놓고 갔다. 그러나 우리는 더이상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만들었던 김명준 감독의 신작 <그라운드의 이방인>(가제)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그들을 다시 소환하는 다큐멘터리다. 그중 1982년 봉황대기 준우승의 주역이었던 재일동포 야구단 멤버 4명이 31년 만에 다큐멘터리 촬영차 고국을 방문했다. <씨네21>은 그들의 고국 방문을 1박2일 동안 동행했다.

양시철 50살. 투수. 이쿠노공업고등학교 출신. 어깨가 아닌 손목을 이용해 던지는 스타일. 현재 아버지와 함께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권인지 50살. 포수. 미노시마고등학교 출신. 현재 자영업자.

김근 50살. 외야수. 우리학교 출신. 한신타이거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 때까지 야구 선수로 활동. 현재 자영업자.

배준한 50살. 3루수. 미노시마고등학교 출신. 고시엔 봄대회에 출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자영업자.

프롤로그

조계현의 군산상고냐, 양시철의 재일동포냐. 1982년 8월21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제12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은 양팀의 선발 맞대결로 시합 전부터 열띤 화제를 모았다. 당시 조계현은 강속구와 제구력을 모두 갖춘 고교 최고 투수였다. 양시철은 충암고, 북일고, 경남고, 마산고, 광주일고 등 강호들을 상대로 모두 완투승을 거둘 만큼 싱싱한 어깨를 자랑했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군산상고의 우세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승에 오른 재일동포 야구단의 기세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5만명이 넘는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양팀의 철벽 마운드는 봉황대기를 놓고 혼신의 볼을 뿌렸다. 결과는? 이변은 없었다. 군산상고가 4:1로 재일동포 야구단에 승리했다. 아쉽게도 재일동포 야구단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8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으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멤버 중 4명이 31년 만에 결승전 무대였던 잠실야구장을 다시 찾았다. 양시철, 권인지, 김근, 배준한이 그 주인공이다.

제12회 봉황대기 쟁탈전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 기념 사진. 배준한씨는 당시 대회 참가 사진을 전부 보관하고 있었다.

4월4일 오후 5시 @잠실야구장

2013년 한국 프로야구 두산베어스와 SK와이번스의 시합이 있는 날이다. 승합차에서 중년 아저씨 4명이 내리자마자 잠실야구장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이야! 야구장만 그대로네! 하하하.”(양시철) “논과 밭이 있던 자리에 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구나.”(권인지) “(야구장 옆에 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이 한창 공사 중이었던 건 기억나?”(김근) “에러났을 때 3루쪽 관중들이 비웃던 풍경이 생생하다. (웃음)”(배준한) 양시철, 권인지, 배준한, 김근. 올해로 정확히 50살이 된 그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다. 지금도 이들은 오사카시와 그 근처에서 살고 있다. 두산 구단 홍보팀 직원의 안내로 이들과 함께 VIP실에 들어가니 야구 유니폼이 놓여 있었다. 김명준 감독과 다큐멘터리 <그라운드의 이방인> 제작진이 31년 만의 모국 방문을 기념해 특별 제작한 것이다. 시구를 하게 될 양시철의 흰색 글러브가 눈에 띄었다. 태극기와 그의 이름 석자가 오롯이 수놓인 글러브였다.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조은성 프로듀서가 “야구 규정상 공식 시합에서는 흰색 글러브를 착용할 수 없다”며 “이번 시구를 위해 특별 주문 제작한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유니폼 가슴에는 한자로 된 4글자가 굵게 박혀 있었다. 在日同胞(재일동포).

1회전에서 탈락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재일동포 야구단은 충암고, 북일고, 경남고, 마산고, 광주일고 등 전국의 강호를 차례로 꺾고 결승전에 올랐다.

오후 6시20분 @잠실야구장 마운드

“관중 여러분, 오늘 뜻깊은 시구 행사가 있겠습니다. 198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 참가했던 재일동포 야구단이 31년 만에 모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이들을 맞아주십시오.”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소개 멘트가 끝나자마자 네 남자는 마운드를 향해 뛰어올라갔다. 씩씩한 그들의 뒷모습은 시간을 31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했다. 과거로 돌아간 건 시구의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SK 이만수 감독은 더그아웃 밖으로 나왔다. 1회초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연신 배트를 휘두르던 SK의 1번 타자 정근우도 잠깐 멈춰섰다. 두산 선발 투수였던 김상현도 글러브를 벗는 등 양팀 선수단과 관중 모두 시선이 마운드 위에 오른 네명의 아저씨들에게 향했다. 31년 전 함께 서울에 오기로 했던 투수가 사정이 생겨 불참하면서 혼자서 6게임 완투를 해야 했던 철완 양시철이 마운드 위에 섰다. 야구 명문 미노시마고등학교 출신으로 고시엔 봄 예선이 끝나자마자 재일동포팀에 합류했던 3루수 배준한은 타석에 섰다. 포수 권인지와 외야수 김근은 마운드 옆에 나란히 서서 친구의 시구와 시타를 벅찬 가슴으로 지켜봤다. “플레이볼!” 주심의 시구 사인이 떨어지자 양시철은 흰색 글러브 안에 있던 야구공을 꺼내 힘차게 뿌렸다. 양시철의 손을 떠난 공은 타석 앞에서 한번 튕긴 뒤 두산 포수 양의지의 미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배준한의 배트는 시원하게 공기를 가르고, 권인지와 김근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1분도 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막 시구와 시타를 끝낸 그들에게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고국의 관중을 보며 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모자를 벗어 관중의 박수에 화답한 뒤 마운드를 내려오던 양시철은 기자를 보며 짧게 말했다. “원바운드 됐어. 비행기에서 내린 뒤 곧바로 던져서 그런지 피곤했나봐.” 더 잘 던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시구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 3루 더그아웃 앞에 불펜(1루와 3루쪽 페어지역 밖이나 파울 라인과 연결되어 있는 좌우익수 뒤쪽)이 있네. 옛날에는 없었는데.”(김근, 왼쪽) “LCD 화면인 지금과 달리 그때는 전기 전광판이었지. 관중석도 지금보다 훨씬 빽빽했었어.”(권인지, 오른쪽)

양시철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지고 있다.

저녁 8시 @서촌의 한 삼겹살집

재일동포 4인방을 환영하는 회식 자리가 열렸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5년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김명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르는 얼굴도 많으니 자기소개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조은성 프로듀서는 “어떤 이유로 이 프로젝트가 엎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올해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재일동포 4인방과 함께 서울을 찾은 니시우라씨 역시 ‘많은 분’ 중 한명이다. 제작진과 함께 여기저기 수소문해 재일동포 4인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재일동포가 많은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살고 있는 까닭에 어릴 때부터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장면이 될 이날 시구는 ‘임호균 베이스볼아카데미&클리닉’의 임호균 위원의 야구계 네트워크 덕분에 가능했다. 1980년대 삼미슈퍼스타즈와 롯데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한 선수 출신답게 그는 제작진과 두산 구단 사이를 연결해줬다. 임호균 위원은 “고교 선수 시절 재일동포 야구단과 맞붙었던 적은 없”지만 “그들은 한국보다 세련된 선진 야구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밖에도 재일동포 유니폼을 완벽하게 복원한 디자인 스튜디오 미프의 조덕희 대표, 후방에서 다큐멘터리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제작진의 일본 촬영에 손과 발이 됐던, ‘오사카의 곰’ 리키타케 프로듀서 등등. 이번 작업에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기자 역시 자기소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라운드의 이방인>과 재일동포 야구단을 취재하러 왔다고 소개하자 김명준 감독이 “오늘 시구를 본 소감을 얘기해달라”고 요청한다. “유니폼을 입은 네분을 보니 재일동포 야구단이 궁금해졌고, 아직은 잘 모르지만 시구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되돌아보니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

시합 전 (인디즈가 포함된) 재일동포팀과 오버런스팀이 서로 “봐주지 않겠다”며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조은성(왼쪽) 프로듀서가 홈을 밟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배준한을 반기고 있다.

4월5일 오전 11시 @서울 상계동에 위치한 한 대형 불고깃집

재일동포 야구단 4인방의 숙소가 있는 종로에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곳까지 식사를 하러 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조은성 프로듀서가 “이곳 점장님이 31년 전 재일동포 야구단이 묶었던 올림피아호텔 직원이었다”고 귀띔해줬다. 재일동포 야구단이 서울을 찾는다는 소식을 제작진으로부터 전해들은 당시 호텔 직원 문병원씨는 “오랜만에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단다. 31년 전 까까머리 고등학생과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3살의 호텔리어가 지금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 남성이 되어 있었다. 식당 테이블에 앉자마자 재일동포 야구단과 문병원씨는 1982년 당시 재일동포 야구단의 호텔 생활을 대화의 화제로 꺼냈다. “야구단이 호텔 여기저기를 뛰어다녀 애를 먹었다.”(문병원) “그때는 저희가 호텔 매너가 뭔지 몰랐던 때라 죄송했다.”(양시철) “시합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 곧바로 옥상에 올라가 단체로 배팅 연습을 한 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문병원)

당시 고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야구단의 사정은 열악했다. 1년 365일 내내 손발을 맞추던 한국 고교야구팀과 달리 재일동포팀은 일본 각 지역 고등학교에서 선발된 선수들이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연습 시간도 짧았을뿐더러 모국 방문 일정도 빡빡했다. 권인지는 “시합이 없는 날에는 현충원, 한국민속 촌 등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정부 각 기관이 주최하는 파티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상대팀에 비해 연습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보니 당시 야구 기자들은 1982년 재일동포 야구단을 1회전 탈락 예상팀에 올려놓기도 했다. 재일동포 야구단 역시 대회 성적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결과는 달랐다. 결승까지 올라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승리를 거둘수록 재일동포 야구단의 형편은 더욱 쪼들려갔다. 체류 기간이 늘어나면서 경비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김근은 “처음에는 쌀밥을 먹었는데 점점 보리밥으로 바뀌었고, 방도 점점 복도 구석에 있는 안 좋은 방으로 옮겨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은 또 있다. 승리할수록 커지는 모국 관중의 야유였다. 배준한은 “일방적으로 ‘사요나라(잘 가라)!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칠 때 혼란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양시철은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피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한국 사람들도 우리를 같은 민족 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되물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서 현해탄을 건넜고, 어려웠던 그 시절 한국 야구에 여러 도움을 준 그들인데, 우리는 그들의 헌신을 너무 쉽게 본 건 아닌지…. 5만명이 단체로 그들을 향해 외쳤던 “반쪽발이!”니 “사요나라!” 같은 야유는 시합이 끝날 때마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행복해했던 그들에게 분명 상처를 주었다.

양시철 투수가 공을 던지고 있다. 1982년 당시 혼자서 6게임을 책임져야 했던 게 부담스럽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양시철은 “그래서 더욱 기쁘고 즐거웠다”고 대답했다.

오후 3시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한양대야구장

재일동포 4인방이 독립영화인들로 구성된 인디즈와 역시 영화인이 주축이 된 오버런스의 시합에 함께 뛰기로 했다. 인디즈는 숫자가 모자란 재일동포 4인방을 위해 재일동포 유니폼을 입고 같은 팀을 이뤘다. 유니폼 상의만 입었던 시구 행사 때와 달리 상의와 하의 모두 야구 유니폼을 제대로 갖춰 입은 그들의 모습은 31년 전 재일동포 야구단의 그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양시철이 마운드에 올랐고, 배준한은 3루를 맡았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김근과 포수 권인지가 돌아가며 포수 헬멧을 썼다. 강산은 세 차례나 변했지만 이들의 실력은 그대로였다. 양시철은 시원하게 공을 뿌렸고, 김근과 권인지는 안방마님 노릇을 제대로 했다. 배준한은 ‘핫코너’ 3루를 든든하게 막으며 안정적인 1루 송구를 선보였다. 시합 결과는 재일동포팀의 10 대 7 승리. 오랜만에 야구를 한 까닭일까. 경기를 뛰는 내내 이들의 얼굴은 1박2일 동안 본 표정 중 가장 환했다. 헤어지기 직전, 그들은 김명준 감독과 <그라운드의 이방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31년 전 결승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 친구들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저마다 생계도 꾸려야 하고, 삶도 다르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 서울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잠실야구장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김명준 감독와 <그라운드의 이방인> 제작진 덕분이다. 고국을 잊지 않게 도와줘서 항상 감사하다.”(김근)

“모두 함께 파이팅!” 시합이 끝난 뒤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재일동포팀. 그들은 3박4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에필로그

41년 동안 600여명의 재일동포는 고국 야구에 많은 것을 선물했다. 그러나 정작 재일동포 야구단은 자신들이 고국에 무언가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취재를 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김명준 감독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들이 고국을 찾은 이유는 “그저 놀러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헌신 덕분에 한국 야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언가를) 준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는 현실. 그게 우리의 얼굴이다. 우리가 할 도리는 해야 한다. 그들은 야구연감에서나 볼 수 있는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아니다. 600여명의 재일동포 야구단, 아니 60만명의 재일동포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6년. 한국일보와 대한야구협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의 야구를 살리기 위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고국의 부름을 받은 재일대한야구협회와 민단은 일본 고교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야구단을 꾸렸다. 1963년부터는 일본 프로야구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라이온즈) 출신인 한재우 감독이 야구단을 이끌었다. 항공권, 숙박비, 식비 등 적지 않은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포사회는 매년 모금운동을 벌였다. 형편이 좋은 이들은 넉넉하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없는 대로 자식과도 같은 학생들을 위해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모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야구단은 선진 야구 기술과 야구 장비를 선물하고 ‘차별의 땅’으로 돌아갔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는 1968년 제11회 대회까지 이어지다가 1972년부터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로 바뀌었다. 매년 봄과 여름 내내 열리는 일본 고교야구 최고 대회인 고시엔 일정에 맞춰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는 방학 기간인 8월에 열렸다. 다른 고교야구대회와 달리 예선부터 결승까지 토너먼트로 치러졌다(1974년, 1982년, 1984년 세번의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인기가 더해지고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자 고국은 이들로부터 차갑게 돌아섰다. 출전 경비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재일동포 야구단의 모국방문은 1997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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