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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놓인 필통의 상징은?(3)
정리 이주현 정예찬 2013-08-15

박찬욱 감독 마스터클래스, <스토커>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해드립니다

3 엔딩

01 인디아가 떠난 빈집 인디아의 마지막 새들 슈즈가 현관에 굴러다닌다. 그다음 옥수수밭 장면으로 이어진다. 넓게 봐서 신발도 하나의 운송수단이라고 했을 때, 신발에서 자동차로, 운송수단에서 운송수단으로 장면이 연결된다. 엔딩 신을 뉴욕에서 마무리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동차 신 때문이다. 재규어 차량은 인디아의 아버지가 삼촌에게 준 것이고 삼촌이 다시 인디아에게 물려준 거다. 뉴욕의 아파트도 아버지가 삼촌에게 준 것을 다시 인디아가 차지하는 설정으로 생각한 장면이니까, 차량이 대신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인디아가 끼고 있는 선글라스도 결국 아버지와 삼촌을 거쳐 인디아에게 온 것이다.

02~03 달리는 재규어 원래 이 장면은 보안관이 차를 세워놓고 쉬고 있으면 인디아의 차가 휭 하고 지나가고 보안관이 놀라서 쫓아가는 모습을 현란한 카메라 무브먼트로 보여주려 했었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원하는 그림을 찍지 못했고, 결국 해 떨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이 장면을 하나 건졌다. 이때 고생을 참 많이 했다. 해가 떨어지고 있으니 급한 마음에 정정훈 촬영감독은 다음 촬영장소로 뛰어가는데, 외국 스탭들은 그러지 않으니까. 촬영감독 혼자 뛰어가면 뭐하겠나.

04 보안관의 구두 보안관 역은 영국 배우 랠프 브라운이 맡았다. 영국 출신의 매튜 구드는 호주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죽을 맛이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영국 배우가 와서 이날 정말 행복해했다. 이 보안관은 앞서 스토커 저택을 방문한다. 그때는 인디아와 찰리, 두 스토커가의 남녀에게 농락당하듯 퇴장한다. 그러면서 “이 집 가정부가 갑자기 사라졌던데, 어떻게 된 거죠?”라며 불길한 여운을 남긴다. 찰리는 이 사람이 언젠가 다시 올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게 바로 인디아가 보안관을 처단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05~06 보안관의 선글라스+인디아의 맨 얼굴 이 장면도 내가 그렸던 스토리보드와 달라졌다. 인디아의 맨 얼굴은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선글라스에 비치는 모습으로 끝내려 했고, 인디아의 얼굴을 합성용 소스로만 찍었다. 그런데 그때 미아의 연기가 너무 천연덕스럽고 귀여웠다. 뻔뻔한데 사랑스러워서 선글라스 안에만 가둬놓기가 아깝더라. 그래서 콘티를 바꿨다. 이 장면에선 또 누구든지 히치콕의 <싸이코>의 한 장면을 떠올릴 텐데, 촬영 직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카메라를 드는데 그때 <싸이코> 생각이 들더라. 가뜩이나 히치콕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는 영화인데, 본의 아닌 오마주가 탄생하게 된 거다. 또 이 장면을 재밌게 연출해보려고 했던 것 중 하나가 이런 거다. 보안관의 선글라스에 인디아가 비친다. 선글라스를 낀 인디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면 보안관도 선글라스를 벗는다. 이렇게 몇 단계를 거쳐 맨 얼굴과 맨 얼굴이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살인이 벌어진다.

07 인디아의 얼굴 클로즈업 이거, 귀엽지 않나? 앞서 보안관이 인디아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도 인디아는 굉장히 뻔뻔한 표정을 짓는다. 그 장면을 잘 보면, 찰리의 표정은 굉장히 경직돼 있는데 오히려 인디아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새끼 악마같이. 거기서 한술 더 뜬 것이 이 표정이다. 곧이어서 저지를 잔인한 행동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애구나’라는 실감이 든다.

08~10 흉기에 찔리는 보안관 이 장면에서 테이크를 많이 가는 바람에 이날 시간을 다 잡아먹어버렸다. 보안관 대역을 맡은 스턴트맨의 연기가 이상했다. 보안관이 비틀거리며 차도를 가로지르다 옥수수밭으로 떨어지는 것까지를 한 테이크로 가고 싶었다. 상처 부위를 부여잡고, 마치 기묘한 춤을 추듯 스텝을 밟으면서 밭으로 굴러떨어지길 원했는데 스턴트맨의 걸음걸이가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다. 스탭들은 그 모습이 우스워 낄낄거렸지만 감독으로서는 피가 말랐다. 끝내 만족스러운 테이크를 건지지 못했고, 즉석에서 인서트 컷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중앙선에 피가 뿌려지는 숏이다.

11~13 라이플을 들어올리는 장면 이게 결정적인 동작인데, 인디아가 왼쪽 눈을 뜬다. 앞서 인디아가 아버지와 풀숲에 엎드려 꿩을 사냥할 때, 인디아는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왼쪽 눈을 감는다. 그러나 엔딩에 이르러선 양쪽 눈을 다 뜬다. 어떤 완성을 의미한다. 조준경 안만 보는 게 아니라 바깥도 본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존재로 진화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14 옥수수 잎 인디아는 보안관이 도망가는 것을 눈으로 쫓다가 옥수수에 묻은 피를 발견한다. 그리고 옥수숫대에 흘러내리는 피에 좀더 주목한다. 말하자면 정신이 딴 데 팔린 거다. 인디아가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15 피로 물든 꽃 인디아의 시선이 살짝 이동한다. 다른 것을 본다. 바로 피로 물든 빨간 꽃이다. 촬영 당시 벌이 꽃잎에 앉아서 짝짓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카메라에 찍혀서 내겐 흥미로웠던 장면이다. 여기 뿌려진 피는 시각적인 특수효과(VFX)로 만든 거다. 흰 꽃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과정을 좀더 강조하고 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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