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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무어] 대체할 수 없는
송경원 2014-03-25

줄리언 무어

갈색 머리에 주근깨를 훤히 드러낸 민낯. 빈말이라도 미인이라 부르기엔 살짝 어색하다. 하지만 줄리언 무어는 금발의 전형적인 미인들을 지루한 얼굴로 만들고도 남을 만한 어떤 분위기를 마치 캐시미어 숄처럼 어깨에 두른 채 관객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조차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줄리언 무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히스테릭한 중산층의 가정주부일 것이다. 그녀는 영화적 동반자라 할 수 있는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2002)에서 남편의 커밍아웃 앞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여성이 되어 오로지 눈빛으로 관객에게 절박함을 호소했다. 그 시작은 토드 헤인즈와의 첫 작업이었던 <세이프>(1995)부터였는데, <세이프>에서 신경쇠약 직전의 주부로 변신한 그녀는 과장된 행동이나 사건 없이 절제된 표정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외줄 타기를 한다. 이후 줄리언 무어는 별일 없어 보이는 가정의 문제적 여성으로 빈번하게 출연해왔다.

생각해보면 <매그놀리아> <디 아워스> <클로이> <세비지 그레이스> 등 그녀가 인상 깊은 연기를 남긴 작품은 하나같이 우울에 잠긴 여인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줄리언 무어는 특정 이미지와 캐릭터에 갇히는 타입의 배우가 아니지만 그녀 주변에 두르고 있는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동시에 무거운 공기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녀가 평론가들에게 유난히 사랑받는 이유도 깊은 우울을 간직한 내면과 깔끔하고 세련된 외모에서 오는 모순적이고 상반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언 무어는 주연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42번가의 반야>(1994)로 보스턴평론가협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부기나이트>로 LA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 <매그놀리아>로 전미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 프롬 헤븐>으로 2002년 전미 10개 도시의 평론가협회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 순간 배우로서 줄리언 무어의 핵심적인 이미지가 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출하지 않는 내면의 카리스마

줄리언 무어는 유독 섬세한 감정 연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끊임없이 안으로 억누른다. 토드 헤인즈의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뿜어져나오는 매력과 카리스마를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배우”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한 표정을 유지할 때도 주위는 언제나 폭풍처럼 갈등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녀 뒤에 웅크린 갈등은 그녀를 덮치기 위해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고 관객은 줄리언 무어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함께 긴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살얼음으로 덮인 얼굴에 균열이 일어나면 관객은 그 얼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껍질을 벗는 그녀의 표정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한 감정의 도구다. 줄리언 무어는 별다른 장치나 연출이 없을 때도 온전히 연기의 힘만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달리 말하자면 연출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고 싶도록 유혹한다. 어쩌면 그녀의 우아한, 도도한, 기품 어린, 고집스러운, 깐깐한 표정 자체가 어딘가 결핍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압축된 드라마의 상징인 셈이다. 그것은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딸을 돌보지 않는 록스타 엄마 수잔나 역을 맡은 그녀는 늘 불안하고 신경질적이다. 바빠서 딸에게 충분히 애정을 쏟지 못할 뿐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딸 메이지가 자신보다 새 남편인 링컨(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더 애정을 보일 때 그녀는 딸을 잘 돌봐준 링컨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딸과 자신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며 화를 낸다. 메이지의 시선으로 찬찬히 관찰된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활기를 띠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수잔나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줄리언 무어의 공이다. 정말로 무신경해 보이는 남편과 달리 수잔나는 딸의 애정을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이 불안감이 수잔나가 화면에 없는 순간에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든다.

극중 줄리언 무어는 항상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 직전에 입을 다문다. 끝내 놓지 못한 자존심으로 간신히 틀어막은 그 갈등 어린 얼굴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어쩐지 계속 눈길이 머무는 비결은 바로 그 망설임의 순간에 깃들어 있다.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은 메이지를 중심으로 아빠 빌, 엄마 수잔나, 아빠의 애인 마고, 엄마의 애인 링컨이 동등한 비중으로 관찰되는 형식의 영화지만 존재감은 압도적으로 줄리언 무어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함께해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초조함. “옛날엔 엄마도 너랑 똑같았어. 네 엄마가 누군진 알지?”라며 끝끝내 말로나마 마음을 확인받고 싶은 애달픔. 수잔나의 눈빛은 매 순간 상실감, 불안감, 절박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딸을 돌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녀를 온전히 원망할 수 없도록 만든다. 아마도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의 정체는 자신을 향한 엄마의 숨겨진 애정과 그것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아닐까.

“나는 영화를 선택할 뿐이지 역할의 크기를 선택하는 건 아니다”라는 본인의 말처럼 줄리언 무어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며 연기를 펼쳐왔다. 이는 배우 경력을 위한 의식적인 행보라기보다는 그때그때 역할의 매력에 따른 선택이었다. 독립영화에서 탁월한 성취를 선보여온 그녀지만 상업영화에서도 활발히 활동해온 그간의 경력이 이를 증명한다.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작품들이 주로 중산층 가정의 불안감을 표현한 것들이라 유사한 이미지로 굳어진 측면이 있지만 사실 줄리언 무어는 로맨틱코미디나 블록버스터에도 자주 출연한 전천후 배우다. 휴 그랜트와 함께한 <나인 먼쓰>(1995)나 <쥬라기 공원2>(1997)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헝거게임: 모킹제이>에 알마 코인 대통령 역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스스로 드라마가 된 배우

역할의 크고 작음, 장르 혹은 영화의 규모에 관계없이 그녀는 항상 역할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한다. 단지 화면에 그녀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잠시 더 시선이 머물도록 하는 힘. 그것은 일차적으론 그동안 쌓아온 극적인 역할의 후광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살펴볼 때 줄리언 무어라는 배우가 갖고 있는 캐릭터의 해석력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전 없는 배역에는 끌리지 않고” 매 순간 긴장하면서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그녀의 행보는 어떤 역할이든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어떤 작품에 가져다 놓아도 지울 수 없는 그녀의 존재감은 작품의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다른 배역의 크기를 지우는 쪽이 아니라, 함께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쪽이란 점이다. 그것이 줄리언 무어가 역할을 가리지 않는 진정한 앙상블의 배우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주인공이 아닐 때도 마치 주인공처럼 빛나는 이 여배우는 반복된 모순 속에서 절박함을 갈고닦아 이제는 스스로 드라마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디 아워스>

magic hour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미소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는 별다른 설명 없이 깊고 어두운 인물의 내면으로 풍덩 뛰어드는 영화다. 이 깊고 고요하며 실로 두려운 잠수 중에 관객이 부여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오직 흡입력 강한 세 여배우의 연기뿐이다. 무미건조한 삶에 지쳐 방황하는 주부 로라 브라운 역을 맡은 줄리언 무어는 아름다운, 하지만 공허한 듯 비어 있는 미소로 관객을 백색지옥 같은 삶 속으로 동참시킨다. 영혼이 말라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그저 슬쩍 웃는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강인하지만 지친 한 줄기 미소에 관한 한 아직은 줄리언 무어의 이 미묘한 표정을 대체할 배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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