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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영화제 상생의 기본 원칙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4-03-25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디포럼영화제 역사 19년 동안 다른 영화제와 일정이 젓가락처럼 이렇게 딱 붙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막일도 같고, 폐막일도 같다. 심지어 서울에서 두 영화제가 동시에 치러진다. 아니나 다를까, 두 영화제 일정이 똑같은 것에 혼란을 느낀 관객의 불만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바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두달 전부터 사무국을 통해 웬만하면 일정은 서로 피해주는 게 이쪽의 상도이자 예의라고 거듭 촉구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빈 접시처럼 돌아왔다. 맙소사, 하나의 은유를 빗대자면,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골목 상권에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대형 마트의 위용이랄까.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급이 다른 두 영화제가 길 하나를 두고 같은 날 좌판을 벌여야 하다니, 동네 슈퍼같은 인디포럼 입장으로선 몹시 곤혹스럽다. 관객층도 적잖이 겹친다. 아찔하다.

물론 영화제 일정이 법으로 규제된 것도 아니고, 사정상 일정을 변경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제 일정을 짤 때 먼저 ‘달력’을 펴들고 영화제들 일정을 체크하는 게 기본이다. 소소한 일정 변경은 있어도 서로 십수년 동안 지켜왔던 일정은 지켜주기 위해서다. 그것이 이 동네의 불문율이자 상도다. 인디포럼영화제는 5월 말에서 6월 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4월경 주로 영화제를 치러왔다. 하기야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느닷없이 일정을 확 앞당겨 인디포럼 개막일에 그쪽 영화제 폐막일을 겹쳐놓았을 때 뭔가 조짐이 불안하긴 했었다.

여기서 잠깐, 2011년으로 거슬러가보자. 인디포럼영화제가 MB정권의 문화탄압 쓰나미에 가장 휘청거렸던 해다. 영화제가 열리지 못할 뻔했다. 19년 동안 처음으로, 그 해만 부득이 7월 초에 영화제를 열어야 했다. 하지만 7월 말에는 미쟝센영화제가 있다. 두 영화제가 2주 사이를 두고 열리게 된 것. 무조건 일정을 치고 들어온 인디포럼 잘못이었다. 난 인디포럼 의장으로서 미쟝센쪽에 잘못했다고 거듭 용서를 구해야 했다. 다음해에 원상태로 재빠르게 복귀했지만, 당시만 생각하면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한 움큼이다.

2주 간격도 이럴진대 아예 통째로 영화제 일정이 같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물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쪽에서도 사무국을 통해 미안한 마음을 십분 전해왔다. 그러나 단순히 미안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은가. 작품들도, 게스트들도, 관객도 동시에 겹치는 이 혼란한 상황을 미안한 마음 하나로 어떻게 추스르겠는가.

지난 20년 동안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있다. 이 번잡한 와중에도 서로의 일정을 비껴가고 지켜주는 나름의 ‘질서’라는 게 존재한다. 그것이 영화제 생태계 리듬의 기본이다. 영화제 일정이란 고유한 장소를 빚어내는 마법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로 정체성이다. 무슨 내부 사정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영화제를 아끼는 마음에서, 한국의 영화제들이 서로 견실하게 상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하는 진심어린 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