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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쿠간] 나의 진심을 줄게요
장영엽 2014-04-08

스티브 쿠간

영국의 찌뿌둥한 날씨가 사람으로 변한다면? 바로 스티브 쿠간 같은 모습의 인간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웬만해선 잘 펴지는 법이 없는 그의 미간은 처음 만난 사람이 오해하기 딱 좋을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다. 대개의 작품에서 단정한 슈트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타나는 이 남자는 겉모습만 봐서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이나, 그의 차분한 목소리엔 상대방에 대한 거리감과 퉁명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곤경에 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그 모습이 큰 웃음을 준다. 짐 자무시가 연출한 옴니버스영화 <커피와 담배>의 아홉 번째 에피소드, <사촌?>의 한 장면. 배우 앨프리드 몰리나를 만난 스티브 쿠간은(실명으로 출연한다!) 자신이 더 잘나가는 배우라고 생각하며 ‘알고 보니 우리는 사촌 지간’이라는 몰리나의 말을 들은 체만 체 한다. 연락이나 하고 지내게 전화번호나 알려달라는 몰리나의 제안을 모호한 대답만 늘어놓으며 교묘하게 거절하던 쿠간은, 촉망받는 감독 스파이크 존즈와 격의 없이 통화하는 몰리나의 모습을 보더니 태도가 급변한다. “제가 지금 다시 당신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려 한다면… 부끄러운 일일까요?” “네.” 커피숍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망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뚱한 표정. 그 표정이 스티브 쿠간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그를 영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의 반열에 올려놓은 비장의 무기다.

“스티브 쿠간의 성공은 ‘실패’라는 컨셉에 의해 이뤄졌다.” <가디언>의 말이다. 갈팡질팡하는 무례한 남자의 캐릭터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쿠간의 장기라는 얘기다. 아직 한국 관객에겐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스티브 쿠간은 영국의 인기 코미디쇼 <앨런 파트리지>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방송인이 되기엔 자질이 한참 부족해 보이는 앨런 파트리지는, 파트너를 바꿔가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진행자다. 그의 주 관심사는 차와 여자, 그리고 셀러브리티 세계에서 일어나는 너저분한 가십성 사건들이다. 글래머 배우인 빌리 파이퍼를 두고 “ITV 최고의 창녀”라고 서슴없이 폄하하는 그의 입담에 게스트들이 편할 리 없다. 신사다운 척 해봤자 자기 체면을 깎아내리기 일쑤인 앨런의 찌질함을, 영국 시청자는 낄낄거리며 사랑했다. 다시 말해 앨런이 실패할수록, 쿠간의 인기는 높아졌다. 영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인 BAFTA 어워드의 코미디 부문 최우수 남자연기자상을 두 차례나 안겨준 <앨런 파트리지> 시리즈는 코미디언으로서 스티브 쿠간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90년대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앨런 파트리지’ 열풍은 스티브 쿠간을 할리우드로 이끌었다. 성룡과 함께 출연한 <80일간의 세계일주>(2004)에서 그는 하인 파스포트(성룡)에게 휘둘리는 허점 많은 영국 신사 필리어스로 분해 쥘 베른의 원작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다른 즐거움을 줬고,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에선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아 어리바리한 경비원 래리(벤 스틸러)를 도왔다. 하지만 이 당시의 경험을 “보통 영화의, 보통 역할을 연기했다”고 회상하는 스티브 쿠간에게 할리우드는 찬란한 기회보다 실망감을 안겨줬던 것 같다. 그의 재능을 빛나게 해준 건 정작 쿠간의 조국인 영국의 감독이었다. TV 연출자 출신인 마이클 윈터보텀과 합심해 만든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은, <앨런 파트리지> 시리즈와는 다른 의미로 스티브 쿠간의 필모그래피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 섹스 피스톨스와 조이 디비전, 해피 먼데이스와 뉴 오더가 활동했던 80년대 맨체스터 음악신의 풍경을 다룬 이 영화에서, 전설적인 클럽 하시엔다를 만든 팩토리 레코드 대표 토니 윌슨을 연기하는 스티브 쿠간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맨체스터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다. 독설과 시니컬한 영국식 유머, 예술가의 자의식과 정신나간 등장인물들로 가득한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은 쿠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무대가 영국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스티브 쿠간이 각본과 제작, 주연을 맡은 최근작 <필로미나의 기적>은 그를 떠올리면 으레 생각나곤 했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쿠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특유의 뚱한 표정과 시니컬한 태도는 그대로지만, 스티브 쿠간이 연기하는 마틴 식스미스는 지질하고 허술한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철한 기자다. 교통부 공보관에서 억울하게 사임되었다고 생각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인 마틴은, 50년간 가슴속에만 묻어뒀던 입양 보낸 아들을 찾겠다는 할머니 필로미나(주디 덴치)를 인생에 다시 찾아온 ‘잭팟’처럼 여긴다. 전직 <BBC> 기자였던 경험을 살려 필로미나가 아들을 찾는 과정을 절절한 휴머니즘 기사로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마틴은 필로미나와 함께 보스턴으로 떠나지만, 이 여정 끝엔 그가 짐작하지 못했던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2009년 인터넷에서 처음으로 필로미나 리(그녀는 실존 인물이다)의 사연을 접한 스티브 쿠간은 곧바로 기사를 썼던 장본인인 마틴 식스미스를 찾아가 저작권을 넘겨받고, BBC 필름에 영화화를 제안했다. 그렇게까지 쿠간이 애쓴 건 필로미나의 이야기가 자신이 대중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세계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그건 인간다움에 대한 음울하고 패배주의자적인 시선이다. 나는 정말로 진심어린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중략)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태도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지성인들의 엉덩이를 걷어찰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진심을 전하기 위해 스티브 쿠간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코미디를 버렸다. 미혼모 출신으로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수녀원으로부터 핍박받았던 필로미나의 잃어버린 50년을 되찾는 과정을 조명하는 <필로미나의 기적>에서 잔잔한 웃음을 선사하는 건 스티브 쿠간이 아니라 주디 덴치다. 아들 찾는 걸 도와주는 마틴에게 목캔디를 건네고, 호텔 직원의 서비스에 “100만명 중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친절한 사람들이라며 감탄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스티브 쿠간의 눈빛에는 어떤 ‘꼼수’도 보이지 않는다. 대중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유머를 구사하는 데 능한 영국의 유명 코미디언은 여기에 없다. 대신 새롭게 주목할 만한 정극연기자 한명이 그 자리를 채운다. 자그마한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 뒤 “나였다면… 절대 용서 못해요”라며 터져나오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티브 쿠간의 다른 모습을 발굴해낸 것은 다름 아닌 쿠간 그 자신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코믹한 이미지”로만 보는 시선이 못내 아쉬웠던 그는 “진지한 역할을 맡으려면 나 스스로 애써야겠구나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스티브 쿠간이 처음 마틴 식스미스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필로미나의 딸 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요? 그가 그렇게 심각한 역할을 연기할 수 있을까요?” <필로미나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이 던질 이 질문에 대한 스티브 쿠간의 대답이다. 그러니 진작 알아채지 못한 영화계 관계자들은 깊이 반성할 일이다. 이 남자의 내면에 또 어떤 다른 모습이 숨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

magic hour

스티브 쿠간식 유머

“난 케임브리지대학 나왔어.” 할 말이 없을 때마다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의 토니 윌슨(스티브 쿠간)은 학력을 들먹인다. 그런데 ‘팩토리 레코드’라는 레이블의 어엿한 사장인 이자가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작자들을 보고 있으면 명문 대학 출신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조이 디비전의 보컬 이언 커티스는 베르너 헤어초크 영화를 보다가 문득 목을 매 자살하고, 레이블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미팅 자리를 앞두고 해피 먼데이스의 멤버들은 프라이드치킨을 먹고 싶다며 놀러 나간다. 이 악동들 사이에서 치이고 헤매는 음반 제작자로 분한 스티브 쿠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켜보는 건 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특히 클럽 하시엔다가 문을 닫던 날 아침, 마지막까지 정신줄을 부여잡고 있던 토니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는 하늘에 갑자기 출현한 하나님(스티브 쿠간)과 대화를 나누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나 하나님 봤어.” “어떻게 생겼어?” “나처럼 생겼어.” 스티브 쿠간식 유머를 만끽하고 싶다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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