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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반정치의 시대
김진혁(연출)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4-04-08

며칠 전 와세다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교수님, 그리고 10여명의 학생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었다. 격년으로 중요한 현장을 직접 학생들과 방문한다는 교수님은 역시 언론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내뱉는 말만은 소위 ‘야마’가 확실했다. 그가 던진 야마는 다름 아닌 ‘반지성의 시대’. 일본과 한국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그가 내린 진단이다. 좌우의 문제 혹은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현상은 ‘반지성’이 횡행하는 게 본질이라는 것. 지인의 소개를 통해 열게 된 토론회라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사실 ‘지성’이라고 하는 말이 주는 엘리트주의적 어감으로 인해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았다. 지성이 주는 위선적 느낌, 잘난 척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고, 그래서 솔직한 ‘감성’을 프로그램에 담아내는 데 노력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만든 <지식채널e>는 ‘감성 지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로그램을 만들면 만들수록 나 자신이 ‘지성적’인 인간으로 변화해갔다. 처음의 노력은 나도 모르게 지성적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꾸 내용이 어려워졌고, 러닝타임도 조금씩 늘어갔다. 물론 그럼에도 프로그램이 가진 감성적 특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초반보다는 내용이 딱딱하고 건조해져갔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게 내가 궁금해하던, 하지만 미루고 있던 개인적 ‘화두’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현상의 핵심은 감성 혹은 지성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반지성적 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태도의 첫 단추엔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사회과학 서적 한권을 책상에 휙 하니 던져주며 ‘너희들이 그동안 배운 건 다 거짓말이야’라고 오만한 표정으로 말하던 겨우 한 학년 선배에 대한 반감과 무관하지 않음도 알게 됐다.

맞다. ‘겨우’ 이 정도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성’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였다. 그 경험으로 인해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특히 더 누군가가 ‘가르치려 드는 걸’ 싫어하게 됐고, 책 몇권 읽고 와서 줄줄 떠드는 걸 혐오하게 됐다. 그게 ‘생각하는 힘’을 강조하는, ‘감성’이 듬뿍 담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동력이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나의 반감은 ‘오버’였고, 그로 인해 난 방송사에 입사한 20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지성’에 대한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게 지극히 내 개인적인 ‘반지성’에 대한 고백이라면, 사회적으로 넓힌 차원의 ‘반지성’의 정점엔 ‘반정치’라는 혐오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이게 ‘반지성의 시대’라는 일본인 교수의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안철수’였다. 부디 그의 ‘반정치’가 너무 먼 길을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길 바라본다.

(더불어 오랜 기간 턱없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씨네21> 독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늘 지금처럼 멋지시길….)